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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Apr 16. 2024

우리의 저녁

지금은 비가 와서 벚꽃이 분분해졌지만, 그렇다고 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봄을 맞아 설레는 사람들의 마음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만 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번갈아 휴가를 쓰고 여행을 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헛헛해져서, 나도 일하는 곳 근처 있는 동네 하천을 걸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 파란 하늘, 반짝이게 부서지는 윤슬과 산들바람, 그 풍경 속을 걷는 많은 사람들.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불쾌했다. 맑은 날에 여우비가 갑자기 쏟아지듯이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나들이를 해도 될까. 우리가 이렇게 여가를 만끽해도 되는 걸까.   

  

갑자기 여기에 벚꽃을 즐기려는 인파가 몰려들어서 몇몇 사람들이 압사 사고를 당한다면, 그 사람들은 과연 원색적인 비난을 안 들을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 이후로도 여러 축제들에서 사고의 위험이 있었다. 근래에는 부산에서 있었던 불꽃 축제에서도 안전사고가 일어날 뻔했다. 코로나도 전이었을 때 일이기는 하지만 여의도 벚꽃 축제에는 축제기간 동안 사람들이 백만 명씩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지금도 기를 쓰고 나들이를 한다. 여전히 상식 밖의 인파가 유명 지역에 쏠리며, 참사 당시와의 차이가 있다면 아주 운이 좋게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 정도다. 정말 다행이지만, 딱히 본인들도 놀러 가지 않을 게 아니면서, 비슷하게 놀러 간 누군가를 생명이나 건강을 잃었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이 역겨운 건 어쩔 수 없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있다. 모 당의 대선 후보 캠프가 내놓은 슬로건으로 10년도 넘은 표현이지만, 계속 회자되는 데는 사람들의 바람이 있을 것이다. 업무에 잠식당하는 하루가 아니라, 업무 이후 시간, 즉 ‘저녁 시간’을 노동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보내고 싶다는 바람 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로 노동 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드는 일 같은 게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제도 개선에 힘입어 평균적으로 다소 감소하였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저녁’을 선용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여러 지역 축제를 찾아다닌다든가, 유명 식당이나 상점 등을 방문하는 것은 예사고 휴가 기간을 모아 바라고 바라던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 일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하던 곳으로 잠시나마 떠날 수 있다는 것,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개인은 정신적인 여유를 갖게 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질 거라고 우리는 기대하고 갈망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되었음에도, 개개인은 정신적인 여유나 성숙은커녕, 사회에 불어닥친 반지성주의 광풍에 사로잡혀 더욱 편협한 시야로 살아가게 되었다. 복지 제도나 노동권에 있어서 한국보다 앞서 있는 서구 선진국을 아무리 여행했어도, 국내 내국인,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다. 자신도 여가를 보낼 수 있기에 타인의 여가에 대해 이해하고 관용할 거라는 예상은 이태원 참사와 같은 사회적 참사에 대한 몰이해나 혐오 발언으로 무색해졌다. 


우리는 왜 그럴까? 아직도 우리의 ‘저녁’이 많이 모자라서일까. 우리가 바라는 여가가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것으로서, 타인의 노동을 갈아 넣은 스펙터클을 소비함에 그쳐서일까. 여가가 경쟁적 현실의 막간극이자 도피처로 사용되어서일까. 입시 교육 이외의 교양이나 평생 교육 과정이 부재하기 때문에 더 많은 저녁이 있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편협한 인식과 지성을 쉽게 교정할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의 복합체?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우리의 ‘저녁’이 이대로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녁이 이대로라면 하루 웬 종일을 노동에 쏟아부었던 옛날 사람들보다 우리의 처지가 더 낫다고는 할 수 있어도, 우리의 인격 자체가 그들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에 뒹구는 배부른 돼지 정도가 우리의 처지가 될지도. (이마저도 경기 침체 때문에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세월호 참사도 10주기가 된 마당에, 전쟁 일선에 나갈 것도 아니면서 꼿꼿하고 비장하게 서서 죽는 것만이 애도할 가치가 있으며, 수학여행 해상사고나 핼러윈 데이 파티 사고는 애도할 가치가 없다는 속물근성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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