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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준 Oct 28. 2020

나라는 어떻게 망하는가 -4

조선은 어떻게 망했는가 - 수차례의 백색테러 기획

명성황후 암살 시도는 을미사변이 처음은 아니었다. 개화파는 자신들을 향한 민씨들의 테러 위기를 여러 차례 모면하고 나서야 "왕비를 죽여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판단했다.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된 사건이 첫번째 도화선이었다. 그에게 접근해 존경 운운하며 수행원을 자처하던 홍종우는 고종과 민씨들이 보낸 자객이었다. 김옥균은 10여 년의 일본 망명 생활을 몹시 불우하게 보냈다. 갑신정변 직전까지 그를 돕던 일본 정치인들은 쿠데타 실패 이후 관심과 지원을 끊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는 김옥균 본인의 처세 잘못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망명객답게 조용히 지내며 은연자중하는게 아니라, 주색잡기로 세월을 보내고 끊임없이 주류 행세를 하려고 했으니까. 같은 개화파 인사들도 김옥균의 난행(亂行)에 혀를 내둘렀다.


막판에는 자신을 외면하는 일본인들이 아니라 이홍장을 비롯한 청나라 친(親) 서방인사들의 힘을 빌어 조선 정계로 들어가라는 꼬임에 넘어가기까지 했다. 김옥균에게 청나라는 개혁의 꿈을 앗아 간 원수였다. 상해 암살 사건은 이홍장의 양자 이경방(李經方)의 초청이 발단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백색 테러'는 박영효, 서광범 등이 분노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머지 않아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불안감을 떨치려면, 모든 사건과 정국의 배후인 명성황후를 암살해야만 했다. 김옥균처럼 죽어서도 능지처참을 당하는 신세가 안 되려면.

개화파 수령의 불운한 죽음 이후 조선은 동학농민운동(1894.02~1894.11)과 갑오개혁(1894.07~1895.03)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이 내용은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개혁 시도는 그 나름대로의 정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김옥균 암살 사건을 그린 삽화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3개월 전, 1895년 7월 8일자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충격적인 단독보도가 실린다. '왕비 암살 미수 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오사카 아사히는 이 일을 경성사변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기사 내용은 김홍집 내각의 일원이었던 박영효와 유길준 등이 왕비를 죽이고 새 정권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홍집은 3국간섭 이후 명성황후의 획책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암살 미수 사건은 두 갈래의 흐름이 교묘하게 한 지점에서 만나며 벌어진 일이었다. 우선 갑신정변 당시 주도자였던 박영효, 서광범과 이규완, 신응희 등의 동조자들이 계획한 무장테러가 있다.


그들은 대궐 경비병력 교체를 명분으로 잠입해 궁중 쿠데타를 일으킨 후 명성황후를 죽일 계획이었다. 이들과 긴밀하게 소통했던 인물이 유길준인 듯 하다. 서유견문이라는 글을 썼던 '그 사람'이다. 그가 게이오 의숙에 다닐 시절 은사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에 매우 깊게 개입한 조력자이므로 박영효 등이 마음을 털어 놓는 것도 어색하지는 않다.

을미사변의 진짜 기획자라고 할 수 있는 유길준.

'갑신정변 잔당'들의 7월 정변 기도는 금방 외부로 새어나갔다. 일설에 의하면 유길준이 미국인 모스에게 편지를 썼다느니, 민씨들과 접점이 있는 누군가에게 필담으로 누설했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쿠데타는 항상 철통보안이 생명이고 발각되면 수동적 협조자나 방관자도 같이 죽는 법이라 썩 합리적인 설명은 아니다.


박영효의 왕후 암살 실패 이후 드러난 또 다른 플랜은 유길준과 대원군 그리고 그 서손인 이준용의 쿠데타 기획이다. 이쪽은 박영효 그룹보다 훨씬 대담했다. 조선주재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참모인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노우에는 생전의 김옥균과 박영효에게는 쌀쌀맞았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고 대인관계가 좋았던 유길준과 윤치호는 잘 대우했다. 유길준은 일본 외교당국의 직접적인 동의가 없어도 후쿠자와와의 개인적 인연, 오카모토의 협조 등이면 충분히 왕비 암살의 군불을 땔 수 있겠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며느리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대원군의 존재 때문이었다. 국왕의 아버지가 돕는다면, 쿠데타는 거뜬히 합리화되고 합법화될 수 있었다.

만년의 대원군.

그가 누구던가. 한때 임오군란의 배후로 정치복귀를 시도했던 인물이고, 1894년 초 동학군이 봉기할때도 그들을 백색 테러리스트로 이용하려 했던 사람이다. 한때는 유길준과 김홍집도 암살자 리스트에 올랐지만 명성황후를 죽인다는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 대원군과 유길준은 협력 관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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