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뮨미 Dec 29. 2020

계절 3호 - 사람, 난로

< 겨울 >

  유난히 길었던 겨울의 추위가 막바지에 이르러 한껏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시계의 시침이 6에 가까워지고, 창문 너머로 선명히 보였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점차 희미해져 가며 차가운 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당시 나는 자격증 시험을 앞두고 자주 가는 동네 도서관에서 목을 주욱- 뺀 채 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실 평소 대출이나 반납을 주로 이용해왔던 나는 그날도 특별할 것 없이 책을 반납하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내 뒤꽁무니를 주욱- 잡아당기는 듯하더니 이내 두 발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잠시 뒤, 뭔가에 이끌리듯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스터디 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스터디 실에도 불구하고 잘 가지 않았던 한 편의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늘 북적이는 공부방이 아무리 조용할지언정 집중이 잘 될까, 라는 의문이 들어 매번 지나쳐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어떤 무의식이 내게 찾아들었던 것 같다.    


  처음 이 곳에 들어왔을 때에는 앞으로 길게 목을 늘어뜨린 사람이 두어 명 정도 더 있었다. 나는 평소엔 꽤나 북적였던 이 곳이 오늘따라 한산한 모습에 괜한 짜릿함을 느꼈다. 나는 창가 쪽 자리로 가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목이 뻐근해져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 넓은 공간에 나만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여기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기분 좋은 적막감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키는 170 정도로 안경을 끼고, 언뜻 보았을 때 교육직에 종사하는 듯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남자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발소리가 점점 내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나는 머리를 거의 공책에 처박은 채로 글자들을 보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려고 노력했다’가 더 적절하겠다. 나는 집중이 약간 깨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소리가 일정 거리에서 탁, 하고 멈추었다. 그 순간 짤막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나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무언의 인기척을 느껴버려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나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리서 보는데 아무도 없이 혼자 이릏게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이 되게 멋지네요.”

그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아(^^)..” 나는 괜히 목덜미를 긁으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사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우선 씩씩하게 웃어버린 것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엄지를 부드럽게 치켜들더니 “제가 보는 요 각도로 사진 한 장 남겨도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사진 한 장 찍어줄까요?” 라며 이번엔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떠한 장난스러움과 친절함과 공손함이 함께 담겨있었다. 참으로 기묘했다.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마음 한 편에 괜한 아쉬움이 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남자는 뒤 쪽으로 가 모니터 자판기를 잠시 두드리더니 반대편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다시 그 공간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상하게 남자의 그 호탕하게 웃던 미소가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이 공간에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와는 분명 다른 적막감이었다.

 문득, 그 남자처럼 길을 지나가다가 누군가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이었다.


영화 < 북촌방향 > 중


  8시의 쌀쌀한 바람이 아까보다 더욱 세게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희미하게나마 보였던 나뭇가지들도 이제는 아예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나는 널브러져 있던 책들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내 두 볼을 싹, 싹 치기 시작했다. 나는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러나 내 뒤꽁무니는 제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겨울의 바람 위로 자신의 온기가 떠나가지 않도록 굳게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따스함 안에서 기분 좋은 추위를 맞으며 집으로 향해 걸어갔다.


  유난히 추웠던 3월이었다. 그 날 내가 만났던 안경 낀 남자는 그 차가웠던 바람들 사이로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짙은 온기의 잔향으로 내게 남아있다.








*타이틀 사진 - 영화 <해피투게더> 스틸컷

작가의 이전글 3화 - 지나간 책들의 사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