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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뮨미 Nov 17. 2020

계절 1호 - 햇빛 속에서 네 개의 발이 춤을 출 때

< 봄 >

  처음 내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사방에는 어떠한 적막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50년 동안 몸담고 살았던 그 언덕배기 집을 떠나 난생처음 보는 낯선 공간과 사람들, 그리고 어딘가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냄새들은 희거나 분홍빛으로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벚나무들의 완연한 봄의 풍경과는 지극히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낯선 이에 대한 경계를 품고 있으면서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를 향한 그들의 눈동자는 허공에서 떠돌았으며 반 의지적인 몸가짐이 꽤나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을 눈앞에 두고 서 있는 나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언의 두려움이 가장 크게 나를 에워쌌다. 하지만 이 곳에서의 생활은 처음 받았던 그런 느낌과는 점차 달라져갔다.

 이 곳에서 생활한 지 2주가 거의 다 돼갈 즈음에, 늘 혼자 밥을 먹던 내게 먼저 손을 내민 여자가 있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나이는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나와 동년배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점차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늘어갔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좋았다. 허공에 떠돌고, 초점 없는 다른 이들의 눈과 달리 그녀의 눈은 푸르뎅뎅하고 매우 반짝였다. 마치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우리들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동자가 빛났던 것처럼 그녀의 눈은 그렇게 찬란하게 눈부셨다. 심지어 그녀는 머릿결도 굉장히 부드러웠다. 나는 가끔 정원에서 산책을 할 때 햇빛에 비친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곤 한다. 그럴 때면 한적한 낙원에 온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을 참 좋아했다. 그녀는 내게 이 곳에 온 지 5년이 되어간다고 말했다. 이렇게 벤치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저 사람은 이 전엔 무얼 했던 사람인가, 하고 생각해본다고, 그리고 그것이 맞던 틀리던 자기는 그게 이 곳에서 나름 재밌게 할 수 있는 본인만의 게임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늘 새로 온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 늘 먼저 말을 건다는 것이다. 그러곤 장난 삼아 “당신 내가 찍은 거예요.”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게 그리 싫지는 않았다. 또 그녀는 왈츠를 매우 사랑한다. 젊은 시절 잠깐 배운 적이 있었는데 요 근래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하루의 일과 중 2시간은 꼭 왈츠를 춘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중에 내게 왈츠를 꼭 가르쳐주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개월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점심시간이 되어 늘 만나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모래도,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언제나 스마일 배지를 달고 다니는 젊은 언니는 그녀가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침대에 누워있어야 한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나는 그녀가 있는 방으로 직접 찾아가 만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 후로 나도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갔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 곳에 들어왔을 때 느껴졌던 적막감이 또다시 내게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다행히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 그녀처럼 온종일 방에만 있지는 않았다. 늘 그녀와 앉았던 벤치에 등을 기댄 채 그 흩날리던 머릿결을 마음속에서 떠올려야만 했다.


  어느 이른 아침,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이렌 소리는 이 곳에서 응급상황이 발생될 시 나는 소리였는데 화장실이나 식당, 공원, 등등 여러 곳에 배치되어 있다. 아마 식당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식당과 가까워질수록, 웅성웅성 모여드는 사람들이 점점 크게 보일수록 내 심장 박동 또한 빠르게 펌프질을 했다. 어떤 사람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간신히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보니 누워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그녀는 정신이 반쯤 나간 듯이 두 눈이 풀려 있었고, 몸은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정원에 나가 산책을 하고 있었다.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 발밑에 자리를 잡았다. 짹짹 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나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어떻게 된 것일까. 밥은 잘 먹고 있나. 나와 다시 산책을 할 수 있을까.’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그녀였다. 그녀는 창백한 기색에 힘이 없어 보였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머릿결은 이전보다 거칠어진 듯 보였다. 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 밥 먹으러 가요.”

 그녀와 나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로비로 향했다. 그녀는 내게 왈츠를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안색이 걱정이 되었지만 그녀는 연신 괜찮다고 말했다. 우리는 2층 세미나실로 향했다. 나는 한 박자, 두 박자, 어색하고 투박한 동작을 이어가며 그녀의 유연한 리드에 몸을 맡기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에 함께 춤을 추었다. 음악에 맞추어 서로의 호흡을 따라가며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다. 나는 그녀와 이렇게 왈츠를 추고 있자니 난생처음 느껴보는 황홀감과 동시에 기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갈색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 또다시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전과는 다른 적막감이었다.


  나는 그 후로 그녀와 왈츠를 추었던 순간을 종종 떠올린다. 그럴 때면 묘한 행복감이 찾아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그 따뜻한 미소와 갈색 눈동자가 눈앞에서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비록 그녀의 빈자리가 공허하게 느껴졌지만 그녀가 내게 남기고 간 따스함이 더욱 컸던 이유에서 일까. 이 곳은 더 이상 내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이 곳은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또 다른 누군가와 발맞춰 살아가야 할 곳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나는 그녀와의 왈츠를 떠올렸다.








*타이틀 사진 - 영화 <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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