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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뮨미 Jun 01. 2021

단편 1호 - 남자와 양동이

축축하고 조잡한 땅에서 보내는 이야기

‘뚝뚝’


  하, 하고 남자는 짧게 탄식한다. 이번에도 놓치고 말았다. 벌써 두 시간째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남자는 마른세수를 한다. 지금 남자가 짜증이 나 있는 이유는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도 모르는 저 바퀴벌레 때문이다. 이 곳은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아주 컴컴한 곳이기 때문에 사실 저것이 바퀴벌레인지 지네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 곳에서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남자는 바퀴벌레라고 단언할 뿐이다. 자기 얼굴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이 방에서 벌레를 잡고야 말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그의 의지력은 참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애석하게도 남자는 바퀴벌레에 대한 불타오르는 자신의 전투력을 제어할 수가 없다. 사실 남자에게 벌레를 잡고야 말겠다는 간절함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 곳에 본인 이외에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을 뿐이니라. 그런데 이 놈이 갑자기 양동이의 든 자신의 물을 탐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 벌레 주제에 남의 물을 탐내려고 해? 저건 내 남은 식량이라고!

      

 그리고 언제부턴가 이 방 안을 지배하고 있던 정체불명의 시궁창 냄새가 그의 심기를 더욱 건드리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남자의 몸에 배어버린 비릿함으로, 이제는 그 본래의 냄새조차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구역질 나는 그 무엇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더욱 구체적인 역겨움으로 진행되는데 한몫을 한 건, 평생 동안 배출할 땀을 바퀴벌레의 단독 출현으로 인해 단 두어 시간 만에 폭발적으로 쏟아내었기 때문이고, 덕분에 남자의 체력 또한 이미 바닥날 대로 바닥이 난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여기서 남자는 ‘눈 굴리기’를 떠올린다.

 굳이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언제나 제 몫을 다하는, 무엇보다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조차 막강한 힘을 가진 이 ‘눈 굴리기’는 남자가 살면서 꽤나 자주, 써먹는 놀이다. 그리고 지금이 그 놀이를 할 아주 좋은 타이밍이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그저 벌레를 쳐다보는 것 만해도 ‘눈’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남자는 그 흥분 속에서 아주 치열하게, ‘눈 굴리기 놀이’에 전념하고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는 맥없이 흐릿한 눈동자들 사이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벌레에 대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벌레를 열심히 쫓아주어 수고했다는 일종의 격려로부터 온 것인지, 혹은 그의 빠른 두뇌 회전과 출중한 기억력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 원인을 곱씹어 생각해보진 않는다. 사실 남자에게 ‘원인과 결과’를 굳이 따져보는 이 단순한 패턴은 몹시 낯간지러울 정도로 지겹고 따분한, 세상 속 여러 방식들 중 가장 추잡하고 쓰잘데기없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추잡하고 쓰잘데기없는 이 세상 속에서 남자가 재미를 느낄 때는 단연코 영웅놀이를 할 때뿐이다. 영웅놀이는 남자가 매우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는 것으로, 언제나 탈을 쓰고 시작되는 이 놀이에서 그는 특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큰 나무 아래 우두커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을 가장 좋아한다. 지금도 남자는 그 상상 속으로 자신을 데려가, 승리의 탈을 뒤집어쓰고 행진을 시작하려 한다.


『 9월의 어느 바람 부는 가을날. 나는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다.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빽빽한 사람들의 머리들로 가득한 시내 광장. 나는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내려가 수많은 울부짖음을 흠뻑 맞이한다. 그들을 지나쳐 또 다른 곳에서 울부짖음을 듣고, 또 그곳을 지나쳐 최종적으로 나는 이 축복의 대미를 장식할 인적 없고, 풀잎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언덕 위로 오른다. 나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자축하며 승리자의 감격을 누려본다. 나를 뒤따라 온 사람들이 끝없이 환호한다. 그들은 나를 향해 눈물을 흘린다. 끊이지 않는 박수갈채. 휘파람 소리. 환호의 소리. 그 소리들 틈에서 휘휘 높이 치켜든 내 두 손. 그들의 환호는 도저히 끝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아, 벅차오른다....... 아.. 』


  위대하고 위대했던 영웅놀이가 끝이 나니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던 그 역겨운 냄새가 그동안 숙성이라도 되었던 걸까. 한층 더 깊어진 형태로 이제 막 탈을 벗은 남자를 맹렬하게 찌르고 있었다. 그 역겨움 속에서 남자는 다시 그놈을 떠올렸다.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생각보다 놈은 그리 똑똑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려놓은 이동경로를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지, 훤히 내다보이는 놈의 형편없는 두뇌 방식이 남자에게는 그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헛짓거리로 보이는 것이다.  

    

-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30cm, 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두 바퀴.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30cm, 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두 바퀴.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30cm, 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두 바퀴.. 아휴. 단조롭기 짝이 없네. 몸만 빠르지 머리 하나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벌레 새끼가.   

  

  그러면서도 남자는 놈의 패턴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시키기 시작한다. 외울 때까지 반복하는 것은 남자의 오래된 또 하나의 습관으로, 그가 두 번째로 잘하는 일이다. 딱히 시간을 정해 두지는 않는다. 요 정도 되었다 싶을 때 하기를 그만둔다.




  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남자는 다른 종류의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지금 남자의 몸속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남자에게서 흐르고 있는 모든 피가 역류를 하며 그의 몸 곳곳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이 낯섦이 거북하지 않고, 꽤나 신선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리고 피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치 솟아올랐을 때, 남자는 놈에 대한 자신의 전투력이 이제는 완전한 살인 욕구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순간, 남자의 영웅놀이는 다시 한번 시작되었다. 남자는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한 멋있기 그지없는 위대한 영웅, 즉 자신이 금의환향을 하고 있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는 황량한 언덕 위에 올라서 있다. 여기서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감탄과 울컥함과 여유만만한 표정이 환한 미소와 뒤섞여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형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일그러지더니, 이제는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는 듯 무척이나 괴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 분명, 웃고 있는 것이다. 』


  남자는 놈에 대한 자신의 잠재된 살인 욕구를 깨닫게 되었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이 심혈을 기울이며 반복하고 반복하여 외웠던 놈의 패턴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위대한 영웅이 된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상대편을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가지고 있는 전투력을 쏟아 붓기 시작하였다.   

 ‘콸콸콸’

 양동이에 든 물이 바닥을 향해 토하듯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저것이 아군의 피 인지, 적군의 피 인지는 애써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건 남자의 양동이 속 든 물이 처참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지금 남자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광경이 자신에게 그리 낯설지 않음을 느끼고 있는데, 마치 오래된 친구를 길에서 다시 만난 것 마냥 익숙하지만 새로운, 처음이지만 늘 그래 온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든다.

        

- 내가 이 장면을 어디서 봤더라..

     

  남자는 덩그러니 바닥에 쓰러져있는 양동이를 보고 있다. 벌레의 행방에 대한 문제는 우선 뒷전으로 두기로 했다. 그놈이 물속에 빠져서 여유로운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지, 혹은 저 벽 위에 보이지 않는 틈새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양동이가 어떻게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도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이 곳에서 유일하게 남자가 의지했던 양동이가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빈껍데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지금 그에게서 가장 중요할 뿐이다.

 어느새 바닥에 쏟아진 물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문득 남자는 ‘눈 굴리기’를 떠올린다. 다시 한번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라고 생각한다.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본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과 어느새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이 오직 양동이 하나만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다. 남자의 이마 위로 굵은 땀줄기 하나가 뜨겁게 타고 내려온다. 길고 긴 대치 끝에 남자가 먼저 후, 하고 마치 대단한 일을 해낸 마냥 짧고 묵직한 숨을 내뱉는다. 그러나 빈 양동이는 빈 양동이일 뿐,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문득 남자는 잠시 잊고 있었던 벌레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잡아 없애고 싶었던 놈이 눈앞에서 사라져 숨조차 쉬지 않으니 이상하게 그리워지는, 아주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드는 것이었다.        


- 혹시 양동이의 물이 생기면 그놈이 다시 나타나려나.      


 하지만 남자는 이미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남자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 이 곳에 양동이를 채울 물은 더 이상 없어. 이미 말라버렸잖아.    


 남자는 쓰러진 양동이를 원래 있던 자리에 어림잡아 세워 놓는다.     


- 물은 없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담?     


 양동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남자는 의도적으로 숨을 쉬고 내뱉어본다. 무언가 해결방도를 찾기 위해 일단 숨이라도 크게 쉬어본다. 잘 떠오르지 않는다. 남자는 그놈이 다시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여전히 양동이 속은 비어있다. 이 곳 또한 여전히 어둡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남자가 그놈을 바퀴벌레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남자는 양동이 속에 들어있던 자신의 물을 떠올린다.

 그리고 양동이 속에 든 자신을 떠올린다.

 남자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꾸역꾸역 그 양동이 안으로 구겨 넣기 시작한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남자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성공한다. 들어가 보니 바깥보다 한층 더 고약해진 냄새가 남자를 먼저 반긴다. 양동이 안의 축축함은 따뜻하다 못해 아늑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실상 더 좋으면 좋았지,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 고요했던 주변 소리가 이제는 들리지도 않아서 드디어 귀가 먹는 건가, 싶어 그는 황홀한 흥분상태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는 자신의 몸이 축축한 건지,  바닥이 축축한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따뜻함은 남자와  몸이 되었다.  곳에는 지금 남자와 양동이, 그리고 벨대로  역겨운  냄새만이 함께 존재하고 을 뿐이다. 남자는  곳이야 말로 나의 집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여기가 바깥에 있을 때보다  일은  없지만 남자는  양동이 안에서 지금껏 자신이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도감과 편안함을 맛보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지나간 수고로움을 위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영원히  양동이 안에,  언덕 위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마음마저 드는 것이다. 그리고  곳에서라면 언제까지라도 그놈을 기다릴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놈이 자신 앞에 얼른 나타나 주기를 바라며 양동이 안에서 자신의 패턴을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똑똑’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방울 소리가 남자와 양동이 위로 희미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타이틀 사진 - 영화 <버닝>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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