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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들때 Jul 13. 2022

눈이 어릿어릿한 어느 날엔

보자,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한 10년도 더 된 것 같다. 이전 직장의 대표님은 책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책상과 서재엔 늘 책이 가득했고, 그렇게 읽은 책들은 자산이 됐으며, 누가 '이런~이런~ 걸 다룬 책이 있으면 좋은데'라 하면 서재 앞을 잠깐 서성이다 쓱 그 한 권을 내어주시곤 모두의 경이로운 눈빛을 살짝 즐기시는 경지였달까. 그렇게 책을 사랑하시는 분이 어느날 하셨던 말씀이 잊혀지지 않는다. "노안 때문에 얼마나 짜증나는지 몰라. 노안 수술이 개발 중이라는데 나는 몇천 만원 들더라도 안전하게 여겨지는 날만 오면 바로 할거야. 그래야 책도 마음껏 읽지!"



그러고보니 대표님이 지금, 노안수술을 하셨는지 궁금해진다. 그러고보니 한번 전화도 드려봐야겠다. 하셨다면 어디서 하셨는지, 하고나니 괜찮으신지, 괜찮은 데 있다면 추천해주실 만한 데가 있는지, 후유증은 없었는지, 그래서 읽고 싶은 책 맘껏 읽고 계신지 등등. 이쯤 되면 눈치채셨겠지만, 맞다. 나도 이제 노안수술에 관심이 많다. 당시 30대 중반의 나이엔 그저 먼 얘기였던 거 같았는데, 이제 40대 중반이 되니 그 어릿어릿한 눈흐림이 뭔지 알 것 같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보던 휴대폰을 밀어두는 때가 제법 늘었다. 그렇게 쓰윽, 남의 일만 같던 '노안'이란 놈이 내게도 찾아온 거다. 움직이는 차 안에서 스멀스멀 느껴지는 멀미와 같이 쓰윽.



그 대표님만큼 책을 사... 사랑까진 아니어도, 꽤 좋아하는 나에게도 노안은 영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사람 사는 이야기, 즉 'story'에 자주 홀리는 나에게 -자연스레 내가 선택한 직업이 나는 스스로 너무 이해된다- 책이 주는 매력과 위로는 상당히 크다. 하물며 책은 그저 재미와 정보를 주는 수단을 넘어 내가 힘들 때 찾게 되는 '케렌시아'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책을 읽다가 어느날 문득 '어라?'하며 맞이하게 된 노안이란 놈의 습격은, 정말이지 일단 너무 기분이 나쁘고, 그 다음엔 아닐거야 도리도리하다가, 마지막엔 덜컥 겁이 나는 수순으로 기억조차 생생하다. 며칠 밤을 두고 나의 케렌시아를 사각사각 위협해오면서 항복만을 기다리는 점령군과 같았달까.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보면 발악이다. 노안이란 놈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나의 발악. 그날부터 이전엔 거들떠도 안 봤던 눈에 좋다는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먹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던 휴대폰은 가능한 봤다 안 봤다로 간격을 넓혔다. 간간이 초록색과 파란색의 자연색을 봐줘야 한다는 어느 TV 속 의사의 조언을 내 주치의의 말인냥 열심히 실천한다. 그래도 어느 날엔가는 노안이란 놈이 날 이기겠지. 그래도 넋놓고 내가 먼저 활짝 문 열고 '어서옵쇼~' 하며 항복하진 않으리. 가능한 천천히, 내 눈으로 온전히 이 모든 것을 보고 또 보고 또 볼 때까지 최대한 버티리라고 다짐하며.



그런 다짐에 단지는 꽤 좋은 친구이나 자극제가 된다. 매일 나가는 산책길, 매번 처음처럼 신나하고 매일 지나는 그 풀길, 매번 처음 가는 길처럼 코를 한껏 킁킁대는 단지. 한참을 풀에 코를 콕 박고는 여기 보고 저기 보며 여기서 코 킁킁 100번, 저기서 코 킁킁 100번. 그렇게 이 녀석은 만끽한, 매번 처음처럼.



우리도 그러자. 어릿어릿한 노안이 느껴질 때, '아뿔사~ 어쩌나~ 슬퍼라' 탄식하거나 주저앉지만 말고 '세상에~ 이랬나~ 신기해~' 탄식하며 보자, 오늘 처음 본 것처럼. 책상 위 가지런히 놓인 사물들도 다시 유심히 보고, 창 밖 저 너머 산줄기도 오늘은 어떤 모양으로 하늘과 조우하나 살짝 더 보자. 그리고 또 보자, 오늘 처음 본 것처럼. 내 옆에 그 사람의 눈매가 저랬나, 턱선이 저랬나, 그리고 풍겨오는 분위기도 보자, 오늘은 기분이 좋구나, 살짝 가라앉아있구나. 그렇게 우리도 만끽하자, 매번 처음처럼.


         

단지야, 산책이 아무리 좋아도 장난감은 두고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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