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엄마랑 했던 대화가 생각나는 밤이다. "엄마, 난 요새 왜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빨리 가는지 모르겠어~" 이어진 엄마 말씀. "아이고, 지금은 한 주지? 이제 봐라, 한 달 되고 한 계절 되다가, 엄마는 이제 한 해 한 해야." (띠로리~)
아직 한 해까진 아니어도, 주 단위는 이미 지났고요샌 한 달한 달이 정말 빠르다. 이 속도면, 나도 조만간 '눈 깜박하니 여름이고 또 눈 깜박하니 가을' 이렇게 계절단위로 세월의 속도를 체감하며 깜짝 깜작 놀랄 날이 머잖은 듯 싶다.
그 와중에건강검진은특히 속도가더 빠른 것 같다.늘 10월에 해왔던 터라 1년 단위로 하는 꼴인데, 이 날만큼은 이상하게 엊그제 한걸오늘 또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검진날만큼은 거의 우리 엄마급 속도로 세월이 껑충 건너뛰어 오는 거다.
무더위와 폭우로 유난했던 올여름도곧 끝나려는지, 부쩍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바람결에 내마음은 이미 속 꽉 찬 가을 알밤을 베어 물었다. 그래서일까, 10월초로 예약된 검진 날짜가 더성큼 눈앞에 와있다. 남은 날짜를 헤아려보니 50일가량인데,어쩐지 마음이 조급해지고 살짝 배가 당기는 것이 긴장도 되는 거 같다. '엊그제 한 것 같은데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고? 말도 안 돼!' 껑충 뛴 세월에 괜스레 야속한 푸념도 절로 나온다.
언제부터였을까, 건강검진이 마치 시험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아무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면 30대는 분명 아녔던 거 같고...그때부터였을까? 유방암일까 의심되니 조직검사를 한번 더 하잔 얘길 들었던 마흔 살의 10월 말이다. 흠. 그것도 아니면 고지혈증이니 약을 먹으라 권유받았던 마흔한 살의 10월일 수도. 아, 아닌가? 속앓이가 잦은 편이라큰맘 먹고 시도한 대장내시경 검사. 저혈압이 심해 수면은 안 되고 쌩(!)으로 해야한다기에, 울며겨자먹기로 내 몸속에서 활개 치던 괴물녀석을 견디며 '세상에. 일제강점기에 이런 고문이 있었다면 난 그냥 시작도 하기 전에 불었을 거야'내 안의 '변절의 씨앗'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발견했던 마흔세 살의 10월일 수도?!
쓰고 보니 더 잘 알겠다. 매해 이런 식으로 뭔가 생기니,공부를 했어도 모르는 게 나오면 어쩌나긴장되기 마련인 것이 시험이거늘 또 어떤 게 튀어나올지 모를 '건강 시험' 역시 왜 안 무서울꼬. 게다가 그것의 시험 범위란 건 딱 떨어지는 1장부터 3장까지도 아니요, 그냥 전체. 당신의 삶과 생활 전체요~ 하는 셈이니그 막연함과 방대함에 불안이 왜 없을꼬.
그래서 작금의 나는, 결연히 건강검진 벼락치기를 선포한 거다. 일명 '50일 프로젝트'. 혼자 거창하게 명명도 해두었다. 사실 이름 대비 알맹이는 단순하다. 운동량 늘리고 먹는 것 조절하기. 전체라는 막막한 시험 범위 중, 그래도 내가 좀 아는 챕터 하나라도 공부하자 마음먹은 셈이랄까. 이제 이틀째를 맞이한 오늘. 야식이 당기는 이 시간, 냉장고 구석구석 유혹거리 천지지만(대체 누가, 왜 마흔을 불혹이라 했는지요?) 입에 달콤한 초콜릿 과자 대신 몸에 단견과류를 오도독 씹어본다. 퇴근길소파랑 한 몸 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30분 걷다 뛰다 했던 나 자신을 칭찬도 해줘 본다.
그렇게 하루하루, 남은 48일도 지나 올해의 건강 시험을 무사히 치른 뒤에는 이만하면 괜찮단 정도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서, '다행이야, 또 1년 잘 지나가 보자~' 감사와 안도의 한숨 쉬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통제'에 몸을 기대 보는 거다. (*모든 심리적 문제의 해결에 있어,결국 할 수 있는 걸 그저 하는 것 이상의 뾰족한 수란 -야속하게도- 별로 없다)
6~7년 전인가 내이염으로 크게 아파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내 강아지 단지는 안타깝게도 한쪽 귀의 기능을 잃었다. 평형감각에 손상이 와 살짝 고개도 기울어져 있다. 새끼 때 겁이 많긴 했지만 다른 모든 대상이 자길 사랑할 거라 여기는 자신감만은 커모두에게 직진 돌격이었던 단지는, 그 이후로는 대상을 가려 슬쩍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로 사람보다는 개 친구들을 마주칠 때 그렇다.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자기의 약함을 공격해올 수 있는 동족을. 가끔 앞에서 오던 개 친구를 보고도 이내 시선을 돌려 못본척 지나가는 그 뒤태가 귀여워 '쫄보'라 놀릴 때도 있지만, 대체로 내 속마음은 '잘했어~'이다. '잘했어, 단지. 그렇게 미리피하는 것도 중요해'라며.
우리네 인생도 뭐 다르겠는가. 여러모로 삐걱대기 시작하는 40대 중년에게 건강 시험은 더더욱 그럴 터. 그냥 할 수 있는 만큼,안 좋단 거 피해 가고 좋다는 거 좀 더 해보며 또 슬쩍 넘어가 보는 게지.그러고 보니 옛날 술꾼 선배들이 건강검진 결과에 안도하며 "또한 해 술을 즐기는 걸 허락받았노라~"우스갯소리 하던것도 떠올라, 피식 웃음이새어 나온다. 그렇게 긴장도 풀어보며 올해의 건강검진 벼락치기를 향한 의지 한 번 더 불끈 내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