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다소 가부장적인 아빠와 부딪히는 일이 발생할 때면,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나와 아들은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고 큰 사달이 날까 봐 애를 끓이곤 한다. 남편은 경상도 출신에 아들만 둘인 집 장남으로 남중, 남고를 거쳐 공대를 나온 남자다. 늘 남자가 득실득실한 곳에서 생활해 왔기에 예민하고 섬세한 여자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타인에 대한 배려는 가득한 사람이라 밖에서의 평판은 아주 좋지만 아무래도 집에선 내가 많이 맞추며 살고 있다.
사실 연애할 때는 무조건 나한테 맞춰주곤 했기에 전혀 몰랐는데, 남편에게 있어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권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시댁 분위기는 여전히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아주아주 가부장적이었다. 반면 우리 집은 아빠가 매우 가정적이셔서 늘 집안일을 함께, 때론 더 많이 하시며 딸들을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그 덕에 딸인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밥 한번 내 손으로 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렇게 다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둘이 가정을 이뤘으니 사사건건 안 맞는 일이 많았다. 자녀들을 훈육할 때의 태도도 많이 다른데, 나는 어떻게든 대화를 통해 납득시키려고 한다면 아빠는 단호하게 혼을 내며 눈물을 쏙 빼놓는 쪽이다.
남편은 딸이 어릴 적에만 해도 어디 가도 뒤지지 않는 딸바보였는데, 딸이 사춘기에 접어들며 아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자 아주 매몰차졌다. 아무리 내가 아이가 사춘기라 그러니 때론 눈 감아줄 필요가 있다고 말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딸 또한 아빠는 늘 본인만 옳다고 하며 자기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불평한다. 이러다 둘 사이가 멀어질까 가운데서 애 태우며 서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은 늘 내 몫이다. 사실 누구 하나 져주면 금방 해결될 상황인데도 똑 닮은 외모만큼 대단한 고집도 판박이인 둘은 꼭 극으로 치닫는다. 다행히 그러다가도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 보면서 같이 깔깔대고 있는 걸 보면 아직 크게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다.
아무튼 이제 시작인 딸의 사춘기는 자타공인 인내심이 보살급 순둥이인 나조차 내 인성의 바닥을 보게 만든다. 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치 벽이랑 이야기하는 것 같다. 본인은 자기 나름의 논리에 따라 말한다고 하지만 듣다 보면 자기 편의대로만 해석하는 궤변에 불과하다. 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무슨 조언이라도 할라치면 마치 탁구공 받아치듯 쳐내기만 하는 딸과의 대화는 속에서 천불이 나게 한다.
사실 난 원체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타인에게 크게 관심을 두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남에게도 잔소리를 잘 안 하는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딸한테는 잔소리를 안 할 수 없다.
공부하라고 하느냐고? 전혀 아니다. 난 오히려 공부하지 말고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으면 해라, 대학도 꼭 갈 필요 없다! 대학졸업장보다 빠른 취업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 줄 수도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럼에도 동네에서 모 영어학원과 모 수학학원을 같이 보내면 계모라고 하는 학원들을 꾸역꾸역 다니며 자기는 공부할 거라고 큰소리치는 건 사실 딸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 딸이냐? 그도 아니다. 늘 숙제는 학원 가기 직전에 몰아서 겨우 겨우 하고 다니는데, 아직까지는 잘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 점점 공부량도 늘 텐데 지금처럼 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정말 공부하려 한다면 그전에 공부습관을 스스로 잡아야 할 텐데 하면서 일단 지켜보고 있다. 어쨌든 공부로는 전혀 잔소리 안 한다. 남편도 나도 공부는 할 놈만 시키자 주의기 때문에 일단 원하는 만큼은 시켜주되 아니다 싶으면 가차 없이 뺄 생각이다.
그러면 대체 뭘로 잔소리하느냐? 사실 이렇게 적으면 누워서 침 뱉기지만 머리 감고 샤워해라, 양치해라! 빨리 자라! 빨리 일어나라! 그저 청결과 규칙적인 생활에 관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씻는 것을 너무 귀찮아한다. 정말 유치원생도 아닌데 쫓아다니면서 씻으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 웃프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우리 딸도 엄마의 잔소리를 경기하듯 싫어한다. 그럼에도 난 너무 억울하다. 다른 엄마들처럼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고 잡는 것도 아니고 그저 씻고, 일찍 자고 일어나라는 건데 그게 왜 그렇게 힘든 건지. 게다가 하라고 할 때마다 나오는 대답도 가관이다. 그놈의 "왜?" 너무 당연한 일에 왜를 붙이며 따지고 드니 정말 기가 막힌다. 급기야 너 그렇게 안 씻으면 누가 보면 엄마가 방임! 그러니까, 아동학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역시 엄마는 자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아동학대범으로 몰릴까 봐 그러는 거라는 헛소리를 아주 정성스럽게 한다.
아~ 더 길어지면 딸을 너무 디스 할 것 같아서 이만 줄여야겠다. 그렇다고 딸이 매 순간 저렇게 밉게 행동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내 이쁜 딸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재밌게 읽은 책의 내용을 조잘거리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눠 먹고, 안아달라며 애교를 부리며 안겨오곤 한다. 뭐 가끔 이상한 맥락에서 애교를 부려 도대체 얘 머릿속엔 뭐가 들었을까 싶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요즘 누나의 사춘기가 심해질수록 울 둘째의 소중함이 커진다. 그나마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고 엄마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라고 자부하는 울 아들이 있어 엄마로서의 내 삶이 아직 보람차다. 정말 이 녀석 안 낳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다.
근데, 벌써 둘째도 예비 초4! 제발 빨리 좀 지나가라 지나가라 하고 있는 딸의 사춘기가 끝날 무렵이면 3살 터울의 아들 사춘기가 오려나? 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