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어두워진 하늘에 초승달과 샛별이 떴다. 초승달은 수많은 별 중 샛별만 데리고 저녁 나들이를 나왔다. 그러면서도 샛별이 자신의 곁으로는 바짝 다가오지 못하게 열 뼘 정도 거리 유지를 선언했다. 너와 나는 떨어져 신비하게 떠 있어야 한다고.
사람도 얼마간의 거리 유지가 있어야 서로 매력적이지 않던가. 그러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신의를 지켜 여명이 터오기 전, 새벽까지 함께 한다. 겨울의 찬 기온 속에 시린 듯, 예민한 듯, 새초롬하게 떠있지만 ‘같이’ 있는 다정한 친구의 정겨움도 느끼게 한다. 선명하게 무한한 동경의 맑은 빛을 뿜으며 고요의 어둠 속에 평화의 기운을 지구에 보낸다.
앙증맞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하여 세파에 버겁게 살아가는 마음이 신비에 젖는다. 어떻게 저런 달과 별이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닌데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어 신비라 느끼고 그 ‘신비’를 어린아이처럼 신의 비밀이라고 자의적 해석을 한다.
맑은 날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태양, 살아 움직이는 수많은 생물, 웅대한 자연 풍광, 지구의 모든 사람이 신비다. 그럼에도 일상으로 접하기에 신비를 신비로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신비가 신비로 느껴질 때면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보이지 않는 존재, 신적 영역 앞에 다소곳이 마음을 겸비하게 되는데 그때 인간의 보잘것없음도 인정하게 된다.
언어상으로 보면 ‘신비’와 ‘겸비’는 끝음절이 ‘비’로 똑같이 소리 나는 같은 모양의 글자다. 그러나 앞에 붙는 첫음절로 인해 확연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서도 상관성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신비(神祕)를 일, 현상 따위가 사람의 힘이나 지혜 또는 보통의 이론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의 신기하고 묘한 일이나 비밀을 뜻한다고 밝히고 있고, 겸비(謙卑)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사람은 어떤 대상과 현상에서 신비를 느끼고 외경심을 갖게 되면 마음을 겸비하게 된다. 사람의 능력이 아닌 신성을 띤 우주의 광대함과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도, 그리고 선택할 수 없는 죽음을 직면할 때도 신비와 두려움은 교차되며 겸비가 함께 한다. 모순 있는 사람이지만 신비 앞에 공손히 마음을 가다듬고 겸비함은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신적 존재를 의식하기 때문이요, 그에 견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고 간 지혜자는 말했다. 신비 속을 살면서도 신비를 신비로 느끼지 못하고 오만 방자히 살면 인생에 수치가 따르고, 겸비하여 자신을 살펴 살면 '가치'가 따른다고. 도시의 불빛과 대기오염 속에서도 샛별과 초승달은 작고 여리지만 선명하게 찬란한 빛을 보내며 무언의 메시지로 겸비를 이끈다.
사람은 자연의 물질을 가지고 수많은 소용 물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생명 자체를 만들지는 못했다. 결혼을 통한 새 생명의 탄생도 결국은 이미 주어진 생명의 몸을 사용하였을 뿐.
인생 자체가 신비다. 나 자신이 사는 것 같지만 사건 사고 많은 복잡한 세상에 살려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신비의 근원 실체를 의식한다.
광대한 우주 속에 한 점도 아닌 티끌에 불과한 미미한 존재로서, 겸비를 잃고 물질 만능의 경제적 부와 이권을 누리는 권력, 유명해지는 명예의 신화를 좇느라 마냥 동분서주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본다. 장단점을 지닌 양면성의 삶이기에 이러한 신화를 필요에 의해 추구할 수 있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해도 지나쳐 치우치는 것은 부작용이 따르는 법, 조화와 균형의 삶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