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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냥 Oct 29. 2020

당신은 가치 있는 존재인가요?

사회로 내던져지는 작은 어른의 가치

초등학생 때 피아노 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다. 아직도 앞부분이 기억날 정도로 당시 연습을 많이 했었다. 트로피를 보는 순간 그동안의 노력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상을 탈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뿌듯함에 다른 분야에서도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기억이 난다.


성취감이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힘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요즘 사회를 둘러보면 그것이 오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취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그만큼 많은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는 노력이 포함된 과정보다는 증명할 수 있는 결과만이 중요한 성과주의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성과주의가 장악한 사회에서는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 과정까지 무시하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저마다의 이름은 지워지고 그 위에 스펙이라는 성과가 대신 쓰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더욱 퍼져나갈수록 성과가 곧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갔다. 기쁨과 뿌듯함을 얻는 도구로 사용했었던 성취는 그렇게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기 시작했다. 순수했던 성취 대신 내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버둥대며 쟁취해야 하는 성과가 짙게 새겨졌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결과가 마치 '나'인 것처럼 여겼다. 성과를 내지 못한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성과를 내 가치와 동일하게 여기는 현상은 삶의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학창 시절에는 나를 탐색하기보다는 대학을 위해 숫자로 된 성과에만 집착하게 되고, 대학 입학 이후에는 취업을 위해 각종 어학 성적과 자격증이라는 성과에 집착하게 된다. 그렇다고 취업 이후에 이 모든 성과주의가 끝나지도 않는다. 승진이라는 결과가 있어야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으며 돈을 빠르게 모아서 집이나 차를 사야 나이에 맞게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자식들이 장성할 나이가 되어도 그 성과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이름 있는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곧 나의 성과가 된다. 그게 중장년이 보여주어야 하는 성과가 되고 말았다. 더 나아가 자식이 아이를 낳게 되면 이제 손자, 손녀의 스펙에 따라 내 가치가 정해지기도 한다.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할 때 내 가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가치를 사회가 마음대로 규정하도록 내어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래서 취업준비로 고민하는 동기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우리 학교의 스펙이 되어줘. 학교나 어학성적이 너의 스펙이 되는 게 아니라 너 자체가 학교의 스펙이 되길!” 정말로 그렇게 되길 바랐다. 사회에서 스펙이라는 말을 지울 수 없다면 나라서 가치가 있는, 그저 존재 자체가 스펙이 되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했다.







작은 어른은 요즘 아주 바쁘다.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가 막바지에 있는 탓에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했다. 이제는 그의 발목을 무겁게 만들었던 자물쇠도, 과거와 미래에 치이며 얻은 걱정들도 사라졌다. 작은 어른은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생기 없는 눈을 하고 집과 회사를 오가는 반쯤 넋이 나간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보이지 않았던 검은 형체가 자꾸만 아른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어른이 그의 주관을 가지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게 될수록 그 검은 형체는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애써 그 존재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형체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짙어졌다. 그렇게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결국 작은 어른은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야? 왜 자꾸 내 주변을 맴도는 거야?”  


검은 형체는 깜짝 놀랐는지 잠시 일렁이다가 대답했다.

“나는 또 다른 너란다. 보렴, 너와 똑같이 생겼잖니. 어떻게 나를 보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어릴 때 만들어낸 내면의 존재란다. 커져서 밖으로 나와 있을 뿐이지. 네가 가치 있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작은 어른은 묘한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 형체의 따뜻한 목소리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말을 이어갔다.

“수호천사 같은 느낌이 드네! 그런데 나 지금 일하러 가봐야 하거든. 너도 같이 갈 거야?”


검은 형체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늘 함께 해왔으니 지금도 같이 가야지. 어서 가자! 늦으면 네가 쓸모없다는 평가를 듣게 될까 봐 걱정된단다.”  




작은 어른은 마지막 말이 거슬렸지만 일단 회사로 가야 했기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검은 형체와 함께 걸으며 도시에 들어섰다. 그 존재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작은 어른아, 이번 일 제대로 성공시켜야 하는 거 알지? 솔직히 이거 아니면 네가 내세울 게 뭐가 있겠니? 아니, 그러니까 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그런 말을 들을까 봐 걱정하는 거란다. 결과가 좋아야 사람들이 네 가치를 알아볼 테니까.”


작은 어른은 걸음을 멈추고 검은 형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꼭 결과로 증명해야 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야?”


그 형체는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가 순식간에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작은 어른아,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을 하는구나. 네가 노력해온 건 아무도 모를 수밖에. 뭔가를 보여줘야 네 능력이 드러나지 않겠어? 결과가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말 거야. 난 네가 그런 취급받는 게 싫단다.”


그 말에 의문을 품어 또 다른 질문을 하려던 작은 어른은 검은 형체 뒤로 보이는 낯선 광경에 사로잡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가 응시하고 있는 곳에는 목에 판자를 건 채, 나무로 된 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작은 어른들이 있었다. 판자에는 자신이 지금껏 쌓아왔던 여러 성과들이 적혀 있었다. 그들 위로 걸려 있는 현수막에는 ‘인간 시장’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형체는 작은 어른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스윽 쳐다보곤 말했다.

“정말 이상적이지 않니? 저긴 인간시장이란다. 다들 자기 가치를 외치면서 구매되길 원하고 있잖아. 자신의 쓸모를 널리 알리는 모습이 참 바람직하지. 저렇게 외치지 않으면 너희의 가치는 점점 사라지고 말 거야.”


작은 어른은 낯설고도 이상한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저런 게 있었지...? 원래 저런 시장이 여기 있었나?”


검은 형체는 별거 아니라는 듯 킥킥 웃으며 말했다.

“그래. 쭈욱 저기 있었어. 네가 내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눈여겨보지 않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저들을 자세히 봐. 모두가 검은 형체들과 함께 있어. 우리가 이렇게 너희를 도와주며 살고 있다고. 안 그럼 너희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살고 말 거야. 인간 시장에서는 결과성과만이 남는 거란다.”


검은 형체가 하는 이야기를 대충 흘려듣던 작은 어른은 인간 시장에 있는 아이 한 명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작은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제 막 나무 상자에 올라 서고 있었다.

‘어라...? 왜 커다란 아이가 저기 서 있는 거지?’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이에게 자꾸 눈길이 가 뚫어져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검은 형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지만 작은 어른은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 형체가 내뱉는 단어들이 점점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봐, 작은 어른아! 내 말 안 들리니? 너 회사에 가서 처리할 일이 있잖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가자."


그는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급하게 회사를 향해 걸었다.




맡은 일을 무사히 끝마친 작은 어른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까 보았던 인간 시장의 커다란 아이가 불현듯 떠올라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그에게 검은 형체는 또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 아주 잘했어. 이제 좀 쓸모 있어 보였을 거란다. 내가 매일 쓸모에 대해 이야기해주니까 네가 이만큼 성장한 거지. 흐흐... 아까 본 커다란 아이도 이제 자기 수준을 알고 작아지겠지? 성과 없이 커지기만 하는 아이들은 쓸모없더라. 모두 작게 만들어서 빨리빨리 교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해.”


그 형체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 다시 온화한 미소를 띠고 수습하려고 했지만, 작은 어른은 무언가 알아차린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작게 만든다니? 아까부터 묘하게 거슬렸는데, 너 정말 내가 만들어낸 내면의 존재가 맞아? 오히려 네가 나를 가치 없게 만드는 것 같아. 나 이제 네 도움받지 않을래.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검은 형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넌 나 없이는 가치 있을 수 없어. 네가 작아져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힘을 얻지! 그래야 널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이끌어줄 수 있는 거고! 널 도와주는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니?”


작은 어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였구나. 날 작게 만든 존재가."


그 형체는 작은 어른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널 항상 도와주는..."


작은 어른은 검은 형체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달려가버렸다. 더 이상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검은 형체는 끈질기게 그 뒤를 쫓았다. 결국 그 둘은 뒷동산까지 추격전을 벌였다. 햇빛이 아주 강하게 내리쬐고 있는 정상에 다다르자 숨이 잔뜩 찬 작은 어른이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형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은망덕한 작은 어른 같으니라고... 내가 널 가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걸 왜 모르니!”


그는 검은 형체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 쪽을 바라보니 불이 붙은 초가 보였다. 작은 어른은 초를 집어 들고 말했다.

"넌 역시 내가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었구나. 이 촛불이 만들어낸 검은 그림자일 뿐이지."


그는 초에 붙은 불을 끄고 그대로 두 동강 내버렸다. 그리고 부서진 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나무상자 위에 올라가 내 가치를 외쳐야 했던 우리가, 나중에는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가 성과와 결과를 자랑하게 된다. 성과를 쫓는 이런 행동들은 마치 내가 원해서 하고 있는 듯 보이곤 한다. 사회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서 당연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로 증명해야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거야."라는 속삭임은 내 주관으로 만들어 낸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성과주의라는 불붙은 초로 인해 생긴 그림자가 속삭이는 소리다. 내 앞에 놓여있는 초 때문에 검은 그림자가 내 형상으로 보이고 있을 뿐. 


성과에 따라 내 가치를 좌우한다면 오히려 스스로의 가치를 깎으며 상품화하고 있는 것과 같다. 얼마든지 변해버릴 수 있는 것들에, 곧 있으면 사라질 것들에 내 가치를 기대지 말자. 내가 가진 능력과 출신 학교, 보유한 자격증의 개수가 내 존재의 가치를 대변해주지는 못한다. 그 과정에서 노력한 부분은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성과가 내 가치의 전부를 입증할 수는 없다. 


세상이 나를 수단으로 삼으려고 할 때 나조차도 스스로를 수단으로 내던져버린다면 누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수 있겠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들 때문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하다. 결과와 성과는 이뤄내는 주체가 없어지면 아무 의미 없는 무용지물이 된다. 행동을 하는 주체인 나의 존재 자체에 가치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톡 치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것들에 내 가치를 내던지게 되면 세상이 말하는 거짓말에 속아버리게 된다. 과정은 사라지고 성과만이 남는 세상, 그것이 옳은 세상이라는 거짓말에 넘어가버리고 만다.

.

.

.

나는 가치 있는가, 나는 쓸모 있는가 물을 필요 없다. 당신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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