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냥 Oct 26. 2020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

내 삶의 겨울,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나는 겨울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눈 오는 겨울을 좋아했다.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면 언니와 함께 밖으로 나가 눈사람을 만들곤 했는데 그 날은 5등신 정도밖에 안 되던 우리가 들기에 버거울 정도로 큰 눈사람을 만들었다. 뿌듯함도 잠시, 지나가던 아저씨 한 분의 도움으로 힘겹게 완성한 눈사람은 안타깝게도 몇 시간 뒤 사라져 버렸다. 늦은 밤 아파트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그 큰 눈사람은 주차하던 차에 치였는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언니와 함께 애도의 마음으로 눈사람 살해 현장에 찾아가 눈덩이 몇 개를 주웠다. 그리고 작은 눈사람들을 만들어 이번엔 부서지는 일이 없도록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친구들은 냉동실에 고이 모셔졌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열어본 냉동실 현장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온도가 생각보다 높았는지 작은 눈사람들이 점점 더 작아져 거무튀튀한 먼지의 흔적만 남기고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그때를 기점으로 겨울을 좋아했던 내 동심도 서서히 녹아내려갔다.


머리가 커갈수록 그렇게 좋았던 눈은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겨울에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던 내 시선은 겨울에 느끼는 불편한 기분으로 옮겨졌다. 애매하게 녹아서 질퍽거리는 눈은 길거리를 다니는데 불편함을 주었고, 눈사람을 만드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던 추위는 더욱 매섭게 느껴졌다. 옷도 잔뜩 껴입어야 되니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다 보니 겨울의 풍경조차도 다른 계절에 비해 더 삭막하게 느껴졌다. ‘식물의 입장에서는 가을에 떨어진 각종 나뭇잎들이 거름이 되어 영양분을 보충해주는 시기겠지만, 사람에게는 굳이 필요한 계절일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겨울이 사라지는 일은 없겠지만.




원하지 않는데 자꾸만 찾아오는 겨울을 보고 있자니 우리의 삶이 떠올랐다. 인생에서도 슬픈 일이나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 불청객처럼 찾아오지 않는가. 물론, 3개월 정도의 길이를 가진 실제 계절과 달리 삶의 계절의 길이는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 서로 다르다. 삶에 찾아온 겨울은 실제 겨울보다 훨씬 더 길 수도 있고, 더 추울 수도 있다. 그 힘든 인생의 겨울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겨울을 떠올려봐. 그 시기는 식물들이 영양보충을 하는 꼭 필요한 시기야. 네 삶의 겨울도 그렇게 여겨보렴!"


곰곰이 생각해보니 겨울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잔인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겪고 싶지 않은 일을 겪고 있는 이에게 “당신이 아픈 계절을 지나고 있는 이유는 봄에 필요한 거름을 만들기 위해서예요.”라는 말이 바람직한 위로일까? 저마다 겨울을 겪게 되는 그 이유는 다르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 겨울이 왔거나, 원하던 일을 망쳐 겨울이 찾아왔거나. 수많은 상황들이 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다음을 준비하는 상황이라면 앞에서 말한 위로가 통하겠지만 모든 종류의 겨울에서 통하는 위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겨울의 어떤 특성을 통해 삶의 겨울을 위로할 수 있을까?


 




작은 어른이 살고 있는 마을에 겨울이 찾아왔다. 그가 사는 집안의 분위기도 겨울에 맞게 바뀌었다. 오전 내내 열어두었던 창문은 어느새 굳게 닫혀 있었고, 옷걸이에 걸려있던 얇은 옷들은 모두 두툼한 옷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작은 어른은 거실 창문 가까이에 놓여있던 푹신한 흔들의자에 앉을 때마다 창가의 찬기에 맞닿아 추위를 느꼈다. 겨울의 온도가 전해지자 그는 차가운 계절이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차갑기만 한 겨울, 너무 싫어.’


작은 어른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담요를 두른 뒤에 다시 흔들의자에 앉았다. 창밖으로 바라본 풍경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집 주변의 많은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만을 내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가을의 다채로운 색깔을 즐기다가 헐벗은 나무를 보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생명력을 모두 빨린 것 같았다. 더군다나 여기저기 쌓여있는 하얀 눈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깔이 한 가지밖에 없는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단조로운 풍경과 색상은 추운 겨울을 더욱 차갑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어른은 일어나서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창가 쪽으로 향했다. 창밖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그때 다시 한번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지만 따사로운 빛이 거실을 밝히며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작은 어른아. 그냥 들어오면 네가 놀랄까 봐 창문을 두드렸어. 나는 햇살이야.”


 작은 어른은 어디를 향해 손을 흔들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 안녕 햇살아. 어쩐 일로 우리 집에 놀러 온 거야?”


햇살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작은 어른의 두 눈이 안쓰러웠는지, 빛의 일부분을 떼 내어 손바닥 크기만 한 요정의 형태로 만들어 말했다.

“날 보고 이야기하면 된단다. 네가 너무 추워하는 것 같아서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왔어. 정확히 말하자면 늘 이 자리에 있긴 했지만...”


작은 어른은 햇살 요정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고...? 그렇지만 밖을 봐. 앙상한 가지에 하얀 눈밖에 안 보이는 걸. 네가 정말로 늘 같은 자리에 있다면 왜 추운 겨울이 오는 거야?”


햇살 요정은 창밖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작은 어른아. 다시 한번 밖을 봐줄래? 내 빛으로 마당에 쌓여있던 눈이 녹고 있어. 나는 어떤 계절에도 늘 같은 자리에 있단다. 창밖으로 보이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상황에 가려져서 잘 느끼지 못할 뿐이지.”


작은 어른은 햇살 요정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눈은 녹았지만 예쁘게 열렸던 열매도, 풍성한 나뭇잎들도 여전히 없는 걸. 조금 더 따뜻하게 해 줄 순 없는 거야?”


햇살 요정은 작은 어른 쪽으로 손바닥을 펼치고 입바람을 후 불었다. 그러자 빛으로 된 구가 만들어졌고 그 안으로 여러 식물들이 보였다.

“작은 어른아.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다. 여기 보이는 건 겨울에 피는 꽃들이야. 동백나무 꽃, 시클라멘, 덴드로븀, 납매... 이 아이들 말고도 많은 식물들이 겨울 햇빛을 받아 꽃을 피우지. 내가 겨울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는 걸 이 친구들이 알려주고 있어.”


작은 어른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햇살 요정이 만들어 낸 꽃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런 식물들도 있다니, 겨울이 춥지만은 않았구나. 생각해보니 네가 있어서 겨울을 나고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이런 친구가 생기다니 기쁜 걸! 앞으로도 지금처럼 그 자리에 있어 줄 거지?”


그의 말에 요정은 싱긋 웃었다.

“당연하지! 많은 사람들이 나를 태양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내 이름은 희망이란다. 잊지 마. 희망은 겨울에도 있어. 조금 떨어져 있어도 네가 알게 모르게 너를 비춰주고 있을 거야.


작은 어른은 햇살 요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에도 태양은  자리에 있다. 어떤 계절에서나 태양은 늘 같은 자리에 고, 그건 추운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공전에 따라 우리가 사는 곳에서 조금  멀리 있게 되는 경우는 있지만, 태양이 내뿜는 희망의 빛은 겨울에도 식물들에게 닿아 꽃을 피게 만든다. 하얗게 쌓인 눈과 꽁꽁 얼어있던 도로 곳곳의 얼음들도 어느 순간 내리쬐는 햇살에 모두 녹아버린다. 이런 현상들을 보며 우리는 겨울에도 여전히 태양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있다.  사실은 모든 인생의 겨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희망이라는 태양은  자리에서 여전히 우리를 비춰주고 있다. 추운 겨울이기에  희망이 뜨거운 여름에 비해서는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겨울에 느끼는 햇살은 차가운 공기와 대비되어 가만히 느껴보면  따스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삶의 계절은 실제 계절처럼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계속해서 변화하며 찾아온다. 그것을 막거나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여러 온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내 의지로 막을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된다. 그래서 ‘각 계절을 어떻게 나면 좋을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다. 계절을 없애고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기보다는 그 계절에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태도, 그것이 우리가 삶의 계절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




봄의 따스함을 이용해 좋은 토양에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여름의 뜨거움에 지나치게 노출되지 않도록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숨을 고르는 것처럼, 가을의 시원함에 취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겉옷을 입는 것처럼. 겨울을 나는 방법에 신경 써보도록 하자. 아프고 힘든 그 시기에 차가워진 온도에만 집중하면, 그 낮은 온도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만이 느껴진다. 따뜻한 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를 위해 겨울의 햇살처럼 따사로이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할 때가 있다. 때로는 따뜻한 집을 향해 내 발로 걸어가야 하는 때도 있다.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는 방법은 희미하더라도 언제나 주위에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차갑디 차가운 그 계절은 끝나게 된다. 가까워질 태양이 없다면 봄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태양이 그 자리에 있고 지구가 공전을 멈추지 않는 이상 계절은 다시금 돌아온다. 우리 삶의 겨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상 희망은 있다.



태양이 어떤 계절에나 당신을 비추고 있듯이



이전 12화 오늘을 살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