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어른을 벗어나며
작은 어른들의 세상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작아진 그들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커다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애정, 타인에 대한 우정과 배려, 꿈에 대한 열정 등을 키워나가기 위해 아하바 나무를 심고 가꿨어야 하는 아이 시절, 주변의 작은 어른들은 그 열매를 아예 건네주지 않거나 이미 자라난 싹을 경쟁과 타인의 시선이라는 칼을 이용하여 베어버렸다.
마음속에 사랑이 자라지 않은 아이들은 스스로의 가치는 물론이고 잠재된 가능성까지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낄 줄 아는 마음을 키우지 못하자 아이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누구인지 서서히 잊어감에 따라 건강한 주관도 제때 자라지 못하게 되었다. 그 주관이 없으면 타인과 세상의 잣대에 쉽게 휘둘리며 결국엔 사로잡혀 작아져버리고 만다. 그렇게 커다란 아이들은 작은 어른이 되었다. 작은 어른이 된 그들은 사랑이 있었어야 할 공허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패한 사랑을 집어넣고 또다시 커다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악순환에 일조하게 된다.
작은 어른의 상황과 마음을 공감하고 문제를 찾아서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이 작은 어른에서 벗어나는 첫 단계이며 그 단계를 거쳐 주관을 깨워야 생각하는 주체적인 나로서 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주관을 깨우는 것에서 그치면 나에 대한 애정이 이기주의로 변할 수 있다. 내 삶의 주어가 '나'에게만 고정된다면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 이기주의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나를 더 잘 살게 도와주는 힘처럼 보이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들이다. 나만 커다란 어른이 된다면 작은 어른의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내가 또 다른 작은 어른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그 속에서 나도 다시 영향을 받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주관을 깨운 뒤에 해야 할 일은 같이 잘 사는 일이 아닐까? 힘을 합쳐 모두가 작은 어른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가능하려면 너와 나를 지키며 우리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서로를 지키며 우리라는 주어도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있는 공허한 빈자리, 부패한 사랑으로 가득 차기도 하는 그곳에 '사랑'이 자라나야 한다. 나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 없다면 타인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으며 무언가를 아끼고,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사랑이 사라지면 우리도 작아질 수밖에 없다. 작은 어른이 잃어버린 건 결국 이름이 아니라 사랑이다.
<작은 어른>을 통해 사랑이라는 마음을 기반으로 그 속에서 여러 가치들이 피어날 수 있길 바란다. 나를 향한 사랑과 믿음이 꿈을 향한 열정과 타인을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우정으로, 그 안에서 자라난 배려와 공감이 이해심으로, 그 이해심이 사회를 향한 보살핌으로 뻗어나가기 바란다. 주관이 깨어난 작은 어른들이 많아질수록, 내면의 변화를 현실에 적용하는 어른들이 많아질수록 작은 어른의 세상은 사라져 갈 것이다.
흔들어 깨워진 작은 어른이 해야 할 일은 내 옆 사람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