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어른에서 벗어난 우리,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까?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한 게시물을 보았다. 그 게시물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과 나이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읊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말했다. “나는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자기소개를 하라는 말에 좋아하는 걸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낯선 광경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소개를 할 때 이름과 소속된 곳을 말하곤 한다. 나를 표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이건 ‘나’를 둘러싼 정보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상대방이 나라는 존재를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이 소속된 곳에 따라 틀에 끼워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 자체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처음 소개를 시작한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했기 때문’,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딱히 생각해본 적 없기 때문’, '나를 드러내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 사실 어느 쪽이든 결국에는 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정의 내려 본 적이 없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까,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내 마음속엔 어떤 꿈이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잘 던지지 않는다. 나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어떨지 고민하고, 그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관심을 가지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소개하라고 했을 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정보만을 제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는 나를 둘러싼 정보에 집중하기보다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잃어버렸던 내 정체성이 담긴 이름을 되찾을 때이다. 숨 막히게 조여오던 시선의 틀을 벗어던지고 내 주관을 깨워 살아가는 방식을 배웠다면 그다음은 인생이라는 드라마를 자유롭게 전개해 갈 주체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나를 향한 따뜻한 사랑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알아가며 작았던 덩치가 점점 커지면, 더 넓은 시야로 공동체 안에 있는 타인의 소중함도 보일 것이다. 서로의 소중함을 알게 된 우리는 그제야 이름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작은 어른이 사는 곳의 뒷동산은 이제 없다. 아하바 나무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에게 부탁을 받은 작은 어른은 그 현실에 슬퍼할 시간도 없이 누구에게 열매를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기 바빴다.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속에 있는 작은 아하바 나무의 열매가 열릴지도 고민이었다. 어떻게든 열매가 열릴 것이라 믿으며 그는 우선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문득 행복을 찾던 이웃집 작은 어른이 떠올랐다.
작은 어른은 주저하지 않고 옆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그 문을 두드리자 작은 어른의 마음속 아하바 나무에 변화가 생겼다. 작은 열매가 열리더니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들 때 열매가 열리나 봐!'
그는 마음의 문을 열어 작은 열매를 꺼냈다. 그때 이웃집 어른의 문이 열렸다.
"안녕! 웬일이야? 놀러 온 거니? 근데 너 원래 이렇게 컸었나?"
작은 어른은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열매가 들려 있었다.
“안녕, 친구야. 너에게 줄 것이 있어서 찾아왔어.”
이웃집 어른은 그가 건네주는 열매를 받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웬 열매야? 먹으라고 준 건가? 어라! 열매가 사라져 버렸어!”
이웃집 어른의 손에 들려있던 열매는 솜사탕이 물에 녹아 순식간에 사라지듯 그의 손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작은 어른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그 열매는 네가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내가 자주 찾아와서 싹이 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게.”
이웃집 어른은 여전히 어리둥절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작은 어른이 더 이상 작지 않음을 느끼고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어른은 아하바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웃집에 자주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하고, 고민도 나누며 이웃집 작은 어른과 소중한 친구가 되어갔다. 이웃집 어른의 마음에도 아하바의 싹이 텄다.
그때쯤 작은 어른의 머릿속에는 인간시장에서 눈이 마주쳤던 커다란 아이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 아이에게도 아하바의 열매를 전해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은 어른은 결국 인간 시장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다시 마주한 아이는 지난번에 본 것보다 훨씬 더 작아진 채로 열심히 자신의 가치를 외치고 있었다. 아이 옆에는 검은 그림자가 속삭이고 있었다. 작은 어른은 있는 힘껏 달려가 아이 앞에 섰다. 그를 따라 비추던 햇살이 아이에게도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검은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대신 그림자를 만들던 초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는 그것을 번쩍 들어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야, 너는 지금 이 초가 만들어내는 거짓말에 속고 있어. 이제야 알려주러 와서 미안해. 너는 존재만으로 소중하단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커다래진 작은 어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누구야? 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은 걸. 무슨 소리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는 아이의 대답에 주관이 깨어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하바의 말이 떠올랐다.
‘아, 아이에게는 아직 이 초가 보이지 않는가 보구나.’
그는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안녕, 나는 어른이라고 해. 이전에는 작은 어른이었는데 이제 마음껏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 너에게 열매 하나를 주고 싶은데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다시 네가 커다래질 수 있게 도와줄게.”
아이는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원래 작은 어른만 있는 거라고 배웠어. 내가 작은 건 너무 당연하다고. 근데 너는 어떻게 그냥 어른일 수가 있지? 아니 어떻게 커다랄 수 있는 거야?”
어른은 아이의 손에 열매를 쥐어주며 물었다.
“소중한 아이야, 너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기억하니?”
아이는 손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린 열매를 보고 잠시 놀랐지만 어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놀랐다.
“잘 모르겠어. 일단 공부를 잘하면 된다고 했는데... 어른 너는 꿈이 있어?”
어른은 따스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꿈 하나가 생겼어. 나는 아이가 작아지지 않도록 가치를 알려주는 사람이 될 거야. 아이야, 너는 너라서 소중해. 너에게 알려줄 것이 참 많단다.”
아이는 어른의 손을 붙잡고 인간 시장에서 빠져나왔다. 불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어른이 걸을 때마다 함께 따라오는 햇살의 따뜻함에 이끌려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어른은 아이와 발맞춰 걸으며 존재로서의 가치를 알려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를 온전히 설명해줄 순 없는 것이라고, 너는 너만의 이야기를 가진 삶의 주체라고.
그렇게 아이의 마음에도 아하바의 씨앗이 심겼다.
어른은 아하바와의 약속대로 사회 곳곳에 그의 씨앗들을 퍼뜨렸다. 씨앗은 이웃집 어른을 통해서도, 작아졌던 아이를 통해서도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점점 <사회> 방송국에서 내보내던 라디오보다 마음속의 아하바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삶은 네가 서 있는 그곳이 무대가 되어 진행되는 드라마야"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살아가는 거지. 그게 바로 우리야"
"너의 가치를 내던지지 마. 너는 너로서 소중해"
"부족해도 괜찮아, 평범해도 괜찮아, 쓸데없지 않은 걸"
"타인의 시선은 산들바람과 같단다. 바람은 상처를 줄 수 없지"
"행복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란다."
변화한 분위기에 맞게 방송국에서도 다양한 이야기들을 방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주관이 깨어나니 방송국의 기준만으로는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다양함이 회복되자 우주에서 본 인간은 다시금 반짝이고 있는 별로 보였다. 어른이 지나가는 곳마다 그 별빛들은 불이 옮겨 붙듯 따뜻하게 퍼져나갔다.
그 따뜻한 별빛들은 퍼지고 퍼져 우리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별빛 속에는 아하바의 목소리가 깃들어 있었다.
"안녕, 나는 너희들이 잃어버린 '그것'이야. 나와 친구가 되지 않을래?"
작은 어른은 어른이 되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어른의 앞에는 괄호가 하나 있다. ‘( ) 어른’, 그것이 그가 찾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그는 때에 맞게 그 괄호 속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자유로움과 용기를 얻었다. 때로는 커다란 어른으로, 때로는 따뜻한 어른으로 그리고 때로는 다양한 색깔을 띠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괄호를 가진 어른으로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되찾은 이름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며, 타인을 돌볼 줄 아는 어른으로서.
( ) 어른이라는 이름을 찾은 작았던 어른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이름에는 정체성이 담겨 있기에 그 이름을 따라 살게 된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무미건조한 기본정보로서의 내가 아닌,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이 담긴 내 이름을 되찾자. 이름 속의 정체성을 세워가려면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내 안에 담긴 가능성을 믿으며 나아가야 한다. 이 나아감은 자신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가능하다. 스스로에 대한 애정이 존재해야 나의 가치를 인지하고 아낄 수 있게 된다. 나의 가치를 알고, 내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이며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 또한 찾을 수 있게 된다.
어떤 날에는 스스로를 명확한 단어로 규정지어도 좋다. 또 어떤 날에는 이야기 속의 어른처럼 괄호를 두어 다양한 내 가능성을 표현해도 좋다.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내 정체성을 만들어갈 수 있을 때, 내 주변에 있는 작은 어른들도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작은 어른 시절을 겪으며 더욱 깊이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먼저 손 내밀어 준다면 나답게, 너답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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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찾으며 나를 향해 생긴 애정이 주변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배려로, 그 관심과 배려가 공동체 속의 이해와 인정으로 퍼져나가며 우리 사회를 다양한 어른들의 세상으로 바꿔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