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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Nov 19. 2020

순천시 승주읍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 갑니다.

-안녕 선암사, 안녕히 계세요 지허 스님-

통영에서의 아름다운 기억을 뒤로하고 순천으로 다시 올라왔어요. 순천에는 늦은 가을비가 내리고, 가을이 한층 더 깊어가고 있었어요. 감나무에 매달린 감도, 이젠 한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는데, 가을비를 맞아 많이 물러져있었어요. 순천에 오니까 산새들이 자주 눈에 뜨이던데, 말랑해진 감을 새들이 먹기에 더 좋을 거 같아요.      


비를 맞아 혹은, 가을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노란색과 빨간색 단풍잎들이, 허공에 휘날리며 승주읍의 하늘과 조계산을 뒤덮고, 산마을 집집의 마당마다, 그리고 조계산을 휘감아 도는 거리에도 쌓이고 있었어요. 선암사로 올라가는 멋진 길들은 울긋불긋 색칠을 한 듯,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해 주었어요. 겨우 이틀만 비웠을 뿐인데도, 순천시 승주읍의 작은 산 마을이 무척이나 그립기도 했고요.  

<순천시 승주읍에서는 거리마다 감나무의 붉은 감이 열려서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안 작가는 서울 사람 치고는, 산마을에 관한 추억이 많은 거 같아요. 인도와 네팔에 머물던 3개월 동안, 거의 히말라야 주위의 산마을에 머물렀는데, 그때의 기억이 평생 잊지 못할 너무나 큰 행복을 줘서 인지, 인도 여행을 마치고 20여 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산마을이나, 산장에서 잠을 자게 되면, 늘 평화를 찾은 듯한 기분이에요.  


통영은 작은 항구 도시였지만, 좁은 도로에 차량은 제법 많이 다녀서, 다소 불편했는데,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로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로 다시 돌아오니, 가로수로 심은 감나무들도 예뻐 보이고, 승주호의 초록 물빛도 아름다웠어요. 국도를 아무리 달려도, 차량 한 대 안보이니까, 국도 전체를 이안 작가가 차지한 거 같아,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도 들었어요.      


그런데, 이안 작가는 오늘 밤을 마지막으로 순천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어요. 서울에서 살 집은, 예전에 계약을 했다가 취소하면서, 사람 좋은 집주인 아저씨도, 다소 기분이 상하셨던 평창동 월세집이에요. (사실 이 집은 지난달에 냥이 [키키]와 헤어지면서, 계약을 번복하게 된 사연이 있어서, 다시 들어가는 게, 키키에게 미안하기도 해요. ㅠㅠ)      


서울로 다시 올게 가게 된 것은, 올 12월 말에 퇴직을 하고 MBC 라디오 PD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내년부터 서울에서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서 예요. 순천시 금둔사의 주지로 계시는, 태고종 종정 지허 스님도. 이안 작가의 나이 이제 50이니,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잘 살면, 두 아이들도 다시 제 곁으로 올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지허 스님을 다시 뵐 수 있었던 승주읍 금둔사에는 겨울을 나기 위해 패어놓은 장작이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듯한 모습으로 쌓여있다>


그래서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려고 해요. 아직은 일을 할 수 나이이기도 하니까요. 제주와 순천에서 나무를 키우거나, 작은 텃밭이라도 가꾸면서, 25년 동안 서울에서 시달린 저를 내려놓는 생활을 해보겠다며 9개월을 머물렀지만, 그 어떤 새로운 시작도 할 수는 없었어요.   

   

50년 평생을 서울 사람으로 살아온 제가, 아무런 준비도, 아무런 재주도 없이, 무작정 산골마을로 들어간다고 해서, ‘나는 자연인이다’하며, 살 수는 없더라고요.      


그래도 그동안 다음카카오의 [브런치]라는 공간에 글을 쓰면서 지낼 수 있어서 행복하기도 했어요. 제 자신과 친구들, 가족, 그리고 세상에 대한 마음 가짐과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거든요. 그동안 제 브런치를 구독해주시고, 홀아비 이안 작가의 생활을 응원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멋진 도시 순천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승주읍 산마을에서의 마지막 밤이에요. 간간이 비가 내리지만 가을바람은 그리 춥지 않고, 멀리서 작은 개 한 마리가 타지인의 냄새라도 맡았는지 짖어대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밤이에요.    

 

제가 머물고 있는 숙소 옆으로는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거실 통유리 앞에는 마당에 서 있는 전봇대보다 크게 자란 돌배나무가, 멋들어지게 펼쳐진 가지에 작고 귀여운 돌배들을 매달고 있어요. 주인집 할아버지는 감나무나 돌배나무마다, 과실 몇 개씩은 따지 않고 그냥 놔두시더라고요. 주말에 손주들이 찾아오면 직접 따게 해주고 싶다고요.        

<이안 작가의 방을 늘 든든하게 지켜 줬던, 선암사로의 돌배나무>


순천에서의 지난 3주는 무척 행복하고 평화로웠어요. 가을 단풍에 불타는 선암사로 오르는 길은 늘 경이로웠고, 금둔사에서 20여만에 다시 뵌 지허 스님은, 이안 작가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그 말씀에 용기를 내어,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어요.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 살아볼 용기를 내게 해 준, 순천의 산마을 승주읍에는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거 같아요. 서울생활에서 지치고 쓰러지면, 다시 돌아와 힘을 낼 수 있을 때까지 머물 거예요.      


오늘 밤을 끝으로 다시 찾을 때까지,

안녕 선암사, 안녕 조계산의 가을아!

<고마웠던 순천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억하기 위해서, 고기를 굽고 와인을 마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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