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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Nov 17. 2020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통영 기행-

순천시 승주읍에서 통영으로 잠시 여행을 왔어요. MBC 라디오에서 PD로 일하면서 만났던 여행작가 중에서, 여행에 대해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국토기행을 정말 사랑하는 ‘노중훈 작가’가, 자주 추천하던 곳이었기에 꼭 와보고 싶었어요. 


동양의 나폴리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애칭보다, 백석, 박경리, 윤이상, 이중섭 등 뛰어난 문인과, 음악인, 그리고 미술가와 인연이 있거나, 영감을 줬던 도시라는 점에서, 통영에 대해서는 늘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서울에서 통영을 오려면, 기차나 비행기 편으로 오기가 좀 애매해서, 직접 운전을 해서 와야 하는데, 저는 하루에 5~6시간 이상 운전을 할 자신은 없었거든요. 3시간 운전을 하면 부실한 허리의 요통이 심해져서, ‘아이~~ 여행이고 뭐고 다 모르겠다’ 하면서, 방바닥에 벌렁 누워 아픈 허리를 쉬게 해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10여 년 전 혹은, 어쩌면 그 이전부터 경남의 도시 중에서, 부산이 먼저 뜨고, 이어서 통영이 뜰 때에, 아내에게 여러 번 함께 가보자고 말은 꺼냈지만, 장시간의 운전에 대한 공포 때문에 포기했던 곳이에요. 통영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기 때문에, 저도 관련 지식은 제법 있었어요.      


...'동파랑 어느 집에 가면 파스타가 이탈리아 현지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더라', '통영의 꿀빵은 꼭 먹어보고 와야 한다', '비진도에 들러 500미터가 넘는 백사장을 꼭 걸어봐야 한다'는 등. 게다가 '소매물도는 동양의 진주다', '동파랑 언덕에 올라 통영시내를 바라보면, 통영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 순식간이다' 등등...     


그동안 이안 작가는, 통영과 관련해서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올린 여행 블로그들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보면서, 가슴속에서 통영을 아름답고 소중한 도시로 품고 있었거든요.      

<동피랑에 올라 내려다본 통영항 >


그리고 무엇보다, 아! 그 사람, 백석.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 살았던 백석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나, 첫눈에 반해버린 여인 난이(애칭)를 만나러, 3번이나 통영을 찾았어요. ‘꿈에도 못 잊을 짝사랑하는 여인 찾아 3만 리’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결국 백석과 '난이'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운명의 얄궂은 장난인지, '난이'의 어머니를 설득하러 함께 내려갔던 백석의 친한 동료와, '난이'는 인연을 맺게 돼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의 가사 같은, 친구의 연인을 빼앗아 버린 야속한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사랑이 주는 고통스러운 쓴 맛을, 백석은 이른 20대의 나이에 맛보게 된 거죠.      


멀고 먼 서울에서 통영까지 찾아갔지만,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통영에 사는 '난이'는 차마 볼 용기가 없어, 그녀의 집 앞을 맴돌았던 아픈 기억을, [통영 2]라는 시로 풀어내기도 했어요.     


...(중략)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 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이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듯 울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통영 2] (백석)

 

이 시속에는 청년 시인 백석은, 그의 짝사랑 여인 '난이'가, 혹시라도 다른 곳으로 시집이라도 갈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동백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 오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잘 드러냈어요. 그리고 서울에서도 눈만 뜨면, 난이가 살고 있는 통영 바다를 그리워했던 애끓는 마음을, 명정골의 풍경을 마치 그림으로 보여주듯이 묘사하며, 잘 나타내고 있지요.     


<통영을 둘러싼 남해바다 위의 떠있는 섬들이 만드는 곡선들은 어머니의 가슴처럼 푸근하고 부드럽다>


백석의 또 다른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또 어떠했던가요?     


... (중략)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중략)        


애절하게 짝사랑하는 ‘난이’가, 친구에게 시집을 가버린 가슴 아픈 이별을 겪고 난 후에 찾은, 또 다른 사랑 기생 김영한(나타샤)에 대한 백석의 감정은 더욱 성숙하고 깊어졌어요. 난이에 대한 사랑이, 소설 [소나기] 속 소년의 마음처럼 순수했다면,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에서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떳떳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대신 나타샤와 함께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먼 산골로, 흰 당나귀라도 타고 떠나고 싶은, 백석의 아픈 사랑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죠. 

     

눈 오는 밤에 나타샤를 그리는 마음을 이렇게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해내다니, 백석은 20살의 천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하기에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그의 작품이 남한에서는 금지되어왔음에도, 1988년에 해금되자마자, 김소월과 이상의 뒤를 잇는, 젊은 천재 시인으로 환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겠죠.  

<1938년 3월 <여성>에 발표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원본.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백석이 짝사랑 한 여인 '난이'가 살았던, 명정골의 통영 명정(통영에 있는 맑은 우물)에 대해서는,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의 작가 박경리는, “마치 부부처럼, 우물 두 개가 나란히 있다”라고 적기도 했어요.     

 

이 대목을 보니, 부부가 나란히 함께 있음이 인간사의 순리일 진대, 서울에 계신 이안 작가의 아버지는 "비록 지금은 이혼은 했더라도, 한 1~2년 후에는 다시 합쳐야 한다. 두 손자 녀석들 때문에, 부부가 헤어지는 건 절대로 안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못난 결혼 살이를 한 죄가 커서, 이안 작가는 제주와 순천 그리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 통영을 떠돌고 있어요.      


저는, 부부처럼 두 개의 우물이 함께 있는 명정골의 '통영 명정'처럼 살 수는 없는 걸까요? 이렇게 외톨이로 이곳저곳을 발길 가는 대로 떠돌아다니다가, 나타샤와 결국 이별을 하고, 눈보라가 매서운 만주로 가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았던 백석과 같은 삶을 살게 될까요?     


내일은 화가 이중섭이 2년 동안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줬던, 서피랑에 가볼까 해요. 

남해안의 작은 항구 통영은 이안 작가에게 어떤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까요?


<주차된 자동차와, 일부 건물이 아니라면 1970년대의 어느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전봇대가 서 있는 통영의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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