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시킨의 우화 속 [파촘킨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되길!-
이런 빛깔의 저녁을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비가 내릴 것만 같은 저녁이었거나, 혹은 비가 아주 조금씩 흩뿌리고 했었고, 노란색 바람이 불던 저녁이었다. 해질 무렵의 석양은 노랗고 붉은빛으로 서쪽 하늘 어디쯤을 물들여 갔고, 비를 품은 구름이 노랗게 번져가는 하늘엔 노랑과 연두 혹은, 두 색깔이 서로 섞인 그 경계 어디쯤에 존재하는 색깔의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런 색의 빗방울들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잠시의 저녁은 마치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찰나의 순간이기도 했는데, 그런 시간이 쉬이 지나가버리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일게 했었다. 사춘기 시절 윗집 창가에 살던 베아트리체를 흠모하던 데미안의 불안한 마음처럼, 그처럼 아름다운 색깔의 하늘빛과 바람과, 빗방물이 이내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었다.
그런 순간에는 자주, MBC FM 라디오에서 도저히 잊히지 않을 거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왔었는데, 예를 들면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 박미경의 [기억 속의 먼 그대에게],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 또는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 같은 명곡이 나왔었다. 피터팬이 MBC 라디에서 음악 PD로 일할 당시에는, 특출한 재능으로 선곡을 빼어나게 잘하던 PD들은 따로 있었다.
마치 피카소가 탁월한 미술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듯, 모차르트가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듯, 마치 선곡이라는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 같은 PD들은 따로 있었다. 그런 PD들은 MBC FM에서 오후 4~6에서 방송되었던 [가요 응접실]이라는 프로그램의 연출로 배정되었다. 피터팬의 유일한 라디오 동기였던 K PD가 그랬고, 나보다 2년 후배였던 N PD가 그랬었다. 선배 중에도 그런 PD가 몇 있었는데, 라디오 후배 중에서는 N PD 외에는 그렇게 선곡을 할 수 있는 PD는 없었다.
그들은 마치 그 시간,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안성맞춤의 곡을 만든 작곡가라도 된 듯 선곡을 했었는데, 그런 음악이 공간을 메우던 노란색 바람이 불던 저녁에는, 세상 그 어떤 어려운 일도 순식간에 해치워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흥분이 흘러넘쳤다. 피터팬은 그런 마법 같은 선곡은 평생 도저히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PD들은 선곡을 위한 마법사들의 학교, ‘호그와트 뮤직 스쿨’의 졸업생들 같기도 했었다.
오늘처럼 노란색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오후 5시 45분을 향해가는 그 시각에 여의도 MBC 사옥 6층 라디오 본부 사무실에는 감성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울렁거리게 만들던 명곡들이 자주 흘러나왔고, 아름답던 그 노래들은 신비로운 하늘색과, 마법 같은 바람, 그리고 감성을 적셔주던 빗방울들의 BGM(Back ground music)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이런 감동을 라디오에서 느끼기가 어려워졌다.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터인가 선곡의 주도권이 AI 시스템에 의한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로 넘어가게 되었고, 라디오 PD들 스스로도 “오디오 월드”에서 라디오 FM의 승리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구심이 생긴 그들은 급기야, 스스로의 재능을 더 이상 드러내지 않기로 했고, 거대 포털사이트와 AI 선곡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일정한 패턴에 익숙해진 청취자들의 취향을 뒤쫓아가기에 급급해했었다.
권력에 대해서 생각한다.
특히 문화권력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그러기 위해서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서술한 일화를, 발터 벤야민이 다시 요약한 내용을 먼저 소개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파촘킨은 다소 정기적으로 재발하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럴 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에게 접근해서는 안 되었고, 그의 방에 출입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궁정에서는 아무도 파촘킨의 우울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특히 사람들은 그 사실을 넌지시 암시만 해도 카타리아 여왕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파촘킨 재상의 우울증이 이례적으로 오래 지속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심각한 폐해가 생겨났다. 서류함에 서류들이 쌓여갔다. 그런데 여왕이 처리할 것을 요구한 그 서류들은, 파촘킨의 서명이 없으면 처리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관들은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때 슈발킨이라는 하급 서기가 들어와서 물었다.
”나리들 무슨 일이옵니까? /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
고관들은 슈발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유감스럽게도 그가 도와줄 수 없는 성질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슈발킨은 이렇데 대답했다.
”그 정도의 일이라면 제게 그 서류들을 맡겨 주십시오 “
슈발킨은 서류 뭉치들을 팔에 끼고서 회랑과 복도를 지나,
고관 누구도 겁을 내서 못 들어가던 파촘킨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펜을 집어다가 한마디 말도 없이 그 펜을 파촘킨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서류들을 들이밀었는데
파촘킨은 넋 나간 사람처럼 모든 서류에 서명을 했다
<발터 벤자민의 학문적 동지였던 유대교 철학자 게르숌 숄렘은 벤자민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평적 내용의 책을 출판하면서 카프카를 포함시키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적었다. 그만큼 1930년대 유럽 지식인들에게 카프카에 관한 연구는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
푸시킨의 일화 속 파촘킨은, 카프카에게는 다락방에 거주하는 판사나 성 안에 거주하는 서기관처럼 권력을 쥔 자들의 선조들이다. 이 권력자들은 제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느닷없이 나타난 문지기들이나 노쇠한 관리들에게 휘둘림을 당하게 된다.
이미 200년 전에 쓰인 푸시킨의 이 우화는 뭘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권력의 타락과 추락은 카프카의 작품 [선고]에서도 우화와 비유를 통해서 나타나고, 현대의 실존적 위기에 대한 체험을 우울한 암호문처럼 묘사해 낸 카프카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오디오 세계 속에서 왕좌의 자리에 있던 라디오 PD들은, AI 스트리밍 서비스들이 점령한 현대적 실존 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우울한 암호문 같은 푸념을 토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푸시킨의 우화에 나오는 파촘킨처럼 그들은 결재를 위한 자신의 펜을 다른 누군가의 손에 쥐어놓고 있다. 과연 누가 이들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
노란색 바람과, 그 빛깔을 담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저녁이다.
그들이 그 계절과 시간 속에서 흥분하고, 전율하고, 감동하면서 느꼈던 순수한 감정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