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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Sep 06. 2021

예순을 넘어서까지 산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음악이 흐르는 풍경, 혼자 남은 밤 / 김광석-

나는 마흔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가을마다 아내에게,


이미 이 생에서는 내가 원하는 모든 걸 다 이루었는데,
더 이상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결혼을 했고, 15년을 살아오면서 남편이자 남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함께했고, 감사하게도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두 아들을 얻어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인, 자식을 낳고 기르는 기쁨을 이미 누렸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지독히도 운이 좋아서 방송국 PD로 20년을 살아오면서, 평생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그 어떤 예술인과도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영화(榮華)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나는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다만 아프지 않게 아침에 침대에서 더 이상 눈을 뜨지 않고 감쪽같이 세상과 이별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반면 아내는 삶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남는 시간이 있다면,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두 아들을 키우면서 동시에 꽤나 나가는 방송작가를 하는 와중에도, 다문화가정을 돌보는 성당의 수녀님과 함께 꾸준히 봉사 활동을 했다.   

   

사춘기를 막 벗어난 큰 아들과 사춘기를 즐기듯 견디고 있던 작은 아들에 대해서도,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두 남자 녀석들을 이만큼 건강히 잘 키워냈으면
이젠 부모의 역할은 다 한 거 아니냐?
앞으로 아이들의 삶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냐?


라고 나는 우겼지만,


책임감이 강했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의 역할은 아직 많이 남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할 거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아내와 달리 늘 무책임한 말만 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에다가, 한량처럼 살던 방송국 PD 25년 차의 남편에게 아내는 더 이상은 아무런 미련이 없었던 건지 어느 날 갑자기 이별 선언을 하고 나를 떠났다. 아이들도 엄마를 선택했음은 당연했다. 늘 무심하거나 엄한 아빠였던 필자보다는, 항상 살갑게 자신들을 챙겨주던 엄마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게 당연했다.


( * 룸펜 프롤레타리아 : 룸펜은, 독일어의 누더기, 부랑아를 의미하는 lump에서 왔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론에서 하류층을 의미했지만,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많이 배웠음에도 그 지식을 쓸 데가 없는 슬픈 지식인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나는 가족과의 이별 후에도 크게 반성하거나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지는 못했다. 워낙 무딘 인간이라서 이별의 아픔이 더디 찾아오는 건지, 아니면 사람 자체가 '인간 말종'이라서 함께 18년을 살아온 아내와 자식들과 헤어지고 나서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건지,


이 무의미한 생을 빨리 마감하는 게,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필자의 동네에 가을의 석양이 지고 있다 >



게다가 계절이 바뀌어 쉰두 번째의 가을이 다시 온 요즘, 부쩍 더 예순을 넘기지 말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예순 번의 찬란한 가을을 겪는다면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지겹던 여름의 무더위가 끝났고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할 저녁 무렵이면,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이 서늘한 바람에 스치울 때마다 희미한 별빛들이 흔들리면서 밤하늘로 퍼져나가는 요즘이다. 일렁이는 별빛들을 바라보며 덩달아 주체할 수 없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단 한 계절 동안만 느낄 수 있어도 인생을 다 산 듯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더 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석양 무렵의 붉은 하늘가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가을 저녁의 바람이 별의 표면을 훑고, 목화 뭉치 같은 구름이 흐트러지기라도 할세라 쓰담 쓰담 거리며, 노을 속에서 머물다 붉은 구름을 밤의 어둠 속으로 몰고 가는 황홀한 장관을 내내 바라볼 수 있는 9월과 10월을 이생 내내 이미 즐길 수 있었는데, 남은 생에 더 이상 무슨 미련이 남아있을까?     


노을 속에 머물던 높은 바람이 서산 뒤로 낮아지는 태양을 따라 산봉우리를 타고 숲으로 내려와 머물다, 나뭇잎을 흔들고 풀잎들을 뉘이는 바람이 되어 들판에 서있는 사람의 곁에 머물고 있을 때의 기쁨을, 이미 쉰 번이 넘도록 만끽했는데, 앞으로 이런 행복을 열 번이나 더 누린다는 건 너무 큰 사치가 아닐까?     


가을 아침의 기쁨은 또 어떠했는가?

여름에서 넘어오며 새벽부터 점점 낮아진 기온에 늦은 아침까지 게으름을 부리며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선선함의 나태'를 즐길 수 있어서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던가?  

   

가을 아침의 여유로움 속으로 커피의 향기가 퍼져나갈 무렵이면, 부지런한 옆집 아저씨는 쌓여가는 나뭇잎들에 비질을 하며 불을 피웠고, 창문 사이로 들어온 타닥타닥 타들어가던 낙엽의 타는 냄새는, 커피 향과 함께 이곳에 가을이 함께 머물고 있음을 만끽하게 해주지 않았는가?  

   

가을의 한낮에는 부쩍 건조해진 공기와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밀린 빨래를 말리는 기쁨 또한 컸다.

하늘이 너무 파랗고 눈부셔서 이런 가을 하늘 아래에서는, 눈처럼 하얀 이불보에 푸른 물이 드는 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필자가 머물렀던 전남 순천에도 가을밤이 찾아오고 있다 >


하지만 그 모든 찬란한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나처럼 무책임한 인간이 쉰두 번이나 눈부신 가을을 무사히 넘기며 산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올해의 본격적인 가을에 접어든 듯한 오늘,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 지금까지도 하루 종일 궁리를 했지만 잘 모르겠다. 예순을 넘어서까지 산다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쉰을 넘어가면서 이젠 육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른 거 같은데, 더 이상 내 생을 살아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올 가을에는 유난히 점점 노쇠해지는 육체의 아픔이 매일매일의 정신을 굴복시키고 있다.


외롭게 나만 남은 이 공간
되올 수 없는 시간들
빛바랜 사진 속에 내 모습은
더욱더 쓸쓸하게 보이네
아 이렇게 슬퍼질 땐
거리를 거닐자
환하게 밝아지는 내 눈물                                              - 혼자 남은 밤 / 김광석-



다만 홀로 남은 이 밤,

내 방을 흐르는 김광석의 노래만이,

가을의 정적을 후벼 파고 있다.


<북반구에서 대표적인 겨울 별자리인 오리온 좌가 서울 새벽 4시에 남동쪽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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