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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Aug 05. 2021

서울의 문화생활 vs
제주도의 문화생활 (2)

-이건희 컬렉션 VS 제주의 봄-

방송국에서 라디오 PD로 25년간 지내면서 온갖 다양한 문화적 사치(?)를 누리다가 제주도로 내려가니 상황이 많이 달랐다. 물론 제주도에도 향토 박물관이 여럿 있었고, 또 내가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박물관이라서 종종 찾았던 추사 김정희를 기리는 [추사 박물관]도 있었지만, 박물관들의 규모와 전시작품의 다양성 등에서 서울과는 비교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오로지 제주도에서만 1년을 머물면서 한해살이를 하는 사람에게는, 문화/예술/공연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진다. 우리나라는 국가 시스템의 거의 모든 게 서울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다른 분야도 상황이 비슷하긴 하지만, 특히 문화 분야에 있어서는 서울 중심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압도적으로 혜택이 많다. 가수들의 콘서트나 연극, 뮤지컬 그리고 여러 가지 문화 이벤트, 아울러 박물관과 갤러리, 심지어 영화를 보는 데도 서울이 압도적으로 편리하고 그 수도 많다. 영화의 경우 독립영화나 제3세계 영화들을 제주도에서 감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반면 작년 겨울에 서울로 다시 올라오고 종로구 평창동에서 살다 보니, 가까운 거리에서도 다양한 갤러리와 박물관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문화 공간에서 주는 혜택도 누리고 있다. 특히 필자가 지금 앉아 있는 [테라로사]라는 카페가 위치한 서울 국립현대 박물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 한창 전시 중이다. 


그 유명한 이중섭의 [황소]와 [흰소]를 비롯해서, 삼호그룹 회장이 소장하다가 삼성 이건희 회장이 다시 사들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그리고 장욱진의 [나룻배],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등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올여름에 필자가 살고 있는 월세집의 무더위를 피해서 국립현대 미술관과 주변의 카페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아직도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직접 보지는 못했다. 무료 관람 티켓을 온라인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는데, 예매시간이 되면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 접속하기가 거의 방탄소년단의 공연 티켓 구하기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티켓 예약하기가 어렵다 보니 전량 무료티켓임에도 중고물품 거래 싸이트에서 장당 5만 원 정도에 불법 거래가 되고 있다!) 

     

박물관은 특정 관람 일자의 티켓을 14일 전 0시에 오픈하는데, 밤 11시 50 무렵부터 티켓 예약 홈페이지에 랙이 걸리기 시작해서, 0시 30초가 되면 이미 황금손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서 예약이 다 끝나버리고, 전회 매진이라는 알림 표시가 뜬다. 그래도 전시는 내년 3월까지니까, '내일은 예매에 성공하겠지!' 하는 바람으로 계속 시도 중이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유가족들이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이번 작품들은, 한국인들 중에 실물을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그 인기가 더욱 높다. 그래서인지 특별전의 티켓을 아직 구하지 못해서 일반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들도, 박물관의 기념품 삽에서 <이건희 컬렉션>의 도록을 사거나, 엽서나 기념품을 구입하고 있다. 필자도 포스터와 기념엽서 등을 구입했는데, '세기의 기증'이라고 할 만큼 이번에 공개된 미술작품들의 수준이 높고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첫 전시회를 기념하고 싶었다.      

<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을 기념하는 엽서와 도록, 마그네틱 기념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엽서는 2,500원, 도록은 8,000원, 앙증맞은 장욱진의 <나룻배> 마그네틱은 8,000원, 대형 포스터는 10,000원 등이다 >


이 회장의 유가족들이 이번에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2만여 점의 미술작품들 중에서, '근/현대미술작품'은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있고, 근대 이전 시대의 작품들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전시기간이 짧아서 전회가 이미 다 매진된 상태이다.      


이처럼 문화적 혜택의 공급도 많지만, 대기수요도 한참이나 밀려있는 서울 얘기를 잠시 미루고, 다시 제주도 얘기로 돌아가서, 지방의 문화예술 발전과 관련해서 다소 구태의연하고 뻔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문화적으로 충분히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발전했기 때문에, 굳이 문화 선진국들이라고 불리는 나라들과 비교한다는 게, '시대를 한참 거스르는 꼰대들의 푸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필자의 경우 1년이 넘게 유럽에 체류하면서 여러 지방도시들에 들렀는데, 유럽의 경우 수도가 아닌 지방도시에도 나름의 특색에 맞는 박물관과 문화행사가 풍성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인도와 중국에 각각 3개월씩 체류할 때도, 각국 지방 도시의 특색에 맞는 박물관과 그곳에 전시된 소장품들의 규모를 보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많다. 특히 유럽에서는 특정 작가의 그림, 혹은 특정 박물관의 소장품을 보기 위해서 수도가 아닌 지방도시를 일부러 찾아간 경우가 많았다. 


그리스 태생이면서 17세기의 저명한 스페인 화가였던, '엘 그레코'의 그림들을 보기 위해서 수도 마드리드에서 버스를 타고 '톨레도'를 찾았다가, 엘 그레코의 그림들 뿐만 아니라, 톨레도라는 작은 도시가 품고 있는 기품과 아름다움에 푹 빠졌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또한 피카소 박물관에 들르기 위해서 스페인 안달루시아주의 남부 도시 '말라가'를 찾았고, 독일의 뮌헨과(뮌헨 박물관), 영국의 스코틀랜드(에든버러 박물관), 또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도(우피치 미술관) 해당 지방도시에만 소장되어 있는 박물관의 작품들을 보면서, 각 지방도시가 갖고 있는 풍성한 문화적 역량에 크게 놀랐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해당 박물관의 작품 수준과, 지방 도시가 주는 색다른 매력은 오랜 기간 기차와 버스를 타고 찾아갔던 여정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해주었다. 특히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15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보티첼리의 작품 [봄]과 [비너스의 탄생] 등을 비롯해서 다수의 작품을 감상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작품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15세기부터 이 일대를 장악했던 메디치 가문의 막강한 재력으로 완성될 수 있었던 미술관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원래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의 반출을 허락하기 않기 때문에, 이곳에 소장된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다빈치 등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피렌체까지 직접 가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런 엄격한 규정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제주도에서의 슬기로운 문화생활]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 예술 작품들보다는, 제주라는 화산섬에 신이 직접 손으로 빚어 놓은 아름다운 자연이라는 예술작품을 즐기고 감동을 받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소중한 보물 제주도에 지역의 특색을 살린 문화예술 공간이 좀 더 풍성했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하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데 3월은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여행객들에게 '제주의 봄' 하면, 노란 유채꽃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필자에게 제주의 봄은 청보리의 물결로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최남단 마라도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 가파도에서 3월부터 축제가 시작되는 청보리는, 제주도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전령사이다. 타 지역 보리보다 2배 이상 자라고, 색깔도 유난히 선명하고 푸르러서 3월에 시작된 푸르름의 물결은, 강한 제주도의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이 휘익 휘익 흔들리면서, 연녹색의 바람을 제주 전역에 퍼뜨렸고, 파란 제주의 하늘과 대비된 청보리의 물결은 제주에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제주의 청보리들은 특유의 강한 생명력으로도 유명해서 건강식품으로 애용되기도 하는데,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유연하게 춤을 추듯 온몸으로 강풍을 이겨냈던 청보리는 3월 초입부터 제주도에 빈 땅이 있다면 어디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5월까지 그 싱그러움을 이어갔다.     


제주도에서는 가끔 3월과 4월에도 눈이 내리는데, 그런 날에는 함박눈에 가득 덮힌 한라산을 배경으로 청보리의 푸른 물결이 펼쳐져 있어서, 두세 개의 계절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듯한 몽환적인 아름다움에 빠지게 했었다.      

<작년 4월 13일에 제주에는 제법 많은 눈이 내렸고, 하얗게 눈이 쌓인 한라산을 배경으로 봄의 전령사 

청보리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


제주의 3월과 4월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나가는 청보리의 건강한 생명력과 푸르름에 감탄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제주 땅의 한편에선 청보리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면, 반대편 또 다른 땅에서는 귤나무마다 하얀 귤꽃이 맺혀갔다.       


귤의 열매는 어렸을 때는 아주 작고 초록색이라서, 귤나무를 처음 본 서울들은 이게 무슨 열매일까? 궁금할 수 있는데, 계절이 여름을 지나면서 노란색이 뚜렷해지고 주변의 한라봉 등 알이 제법 굶은 나무들도 노란색 열매를 달고 있었기 때문에, 초록나무들 사이로 다양한 크기의 동그란 황금색 열매들을 보는 즐거움이 컸다. 

<제주의 봄에는 이는 바람마다 청보리의 초록색 향기가 넘실댄다. >


--------([슬기로운 제주의 문화생활], 다음 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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