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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Jul 29. 2021

서울 동네 한바퀴 VS 제주도 동네 한바퀴

-1년 살이를 시작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 동네 (洞네) : 사람들이 생활하는 여러 집이 모여 있는 곳.     


동네 한 바퀴라는 말을 좋아한다.

필자가 대여섯 살이던 시절, 우리 동네 강북구 수유리 267번지의 동네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서울 도심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떠밀려서, 혹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지만 가난한 형편에 딱히 정착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수유리까지 와서 살았다.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수유 재래시장에서는, 튀김과 어묵을 파는 아줌마, 철물점 아저씨, 이발소 아저씨와 고무신을 팔던 아주머니가 계셨고, 늘 고소한 냄새가 났던 깨를 짜서 참기름 만드는 기름집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필자에게 '동네'라는 공간은, 물리적인 장소의 동네가 아닌, 순전히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필자만의 우리 동네’는 수유시장 딱 거기까지 였다. 수유시장을 지나면 개천이 있었고,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그곳은 우리 동네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누나의 손을 잡고 누나를 대동하지 않고서는, 그곳까지는 도저히 혼자 갈 수 없었으니까.      


특히 수유 개천이 꽁꽁 언 어느 겨울에, 누나와 같이 개천 위에서 썰매를 지치며 재밌게 놀다가 누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개천 위쪽 동네 어떤 나쁜 놈이 내게 개천의 얼음을 던져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날 이후 수유시장 너머의 공간은 우리 편, 우리 동네가 아니고, '나쁜 놈들의 동네'였다.     


필자의 가족이 살던 우리 집 근처의 골목에서는, 나보다 4살 많은 우리 형이 무서워서 감히 날 건드리는 놈들이 없었는데, 수유 개천까지 진출을 하면 나를 못살게 구는 놈들이 있었던 거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 동네라 함은, 동네의 아주머니들이 나를 알아야 했고, 또 전라도 토박이였던 우리 엄마의 '승질이 하도 더러워서(?)', '저 집 막내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소문이 동네 골목대장에게도 어느 정도 퍼져있는 곳, 딱 그곳 까지였다.


동네라는 공간에는 그런 안락함이 있었다.

성질이 더럽기로 소문난(아흔을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성격은 아직도 짱짱하시다!) 엄마의 영향력이 강력히 미치는 곳이었고, 학교에서 전교회장을 하던 필자의 친형 눈치를 봐서, 수유리 골목 이곳저곳에서 껄렁대던 동네 형들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울타리라는 게 늘 그렇듯, 항상 나의 보호막이 되어주던 친형이 초등학교도 졸업하기도 전에 사고로 죽자 나의 전지전능한 기댈 언덕은 없어졌고, 나의 아버지도 그 동네를 떠나기로 결정하셨다. 


동네의 골목길에서 늘 뛰어다니던 형의 목소리가 들릴까 봐,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던 나무 전봇대 위 가로등의 어른거리던 백열등에서는 형이 얼굴이 떠오를까 봐, 그리고 제비들이 자주 앉던 지붕의 처마 밑에서는 비를 피하던 형의 모습이 생각날까 봐, 혹은 하얗게 눈이 쌓였던 마당 위에서는 형이 남긴 발자국이 보일까 봐 ,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셨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과, 이어진 40여 년의 긴 세월을 서울의 강남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 수유리 267번지 골목에서 느꼈던, ‘이곳이 바로 나의 동네’라는 아늑함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평생 내 가슴속에 ‘우리 동네 골목’이라는 공간의 정겨움과 그리움을 품고 살았지만, 그런 공간의 힘이 주었던 아련한 감정을 다시 떠오르게 했던 장소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시절에 책을 사러 광화문 [교보문고]에 자주 들르면서, 광화문과 삼청동 그리고 북촌과 서촌의 경계를 벗어나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강북의 심장 같은 동네에서, 어린 시절에 느꼈던 정서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이곳 동네들의 어떤 점이 나에게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되돌려주는지 알지 못했다.

      

게다가 경복궁 주위의 동네들은 과거 조선의 왕이 살던 곳이고, 나의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수유리는, 백정이나 갖바치 등 천민이 모여 살던 험한 동네였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기와지붕이 있고, 여름에 비가 내리면 빗방울이 떨어지는 댓돌이 있고, 가을날 붉은 빛 나뭇잎들이 떨어지면 낙옆을 한 곳에 모아 구수한 나무향을 피우며 태울 수 있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이고 서있는 수령이 수백 년은 넘은직한 나무들이 있는 강북의 동네들이 좋았다.     


평생 헤어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지켜줄 거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랑하던 아내와 작년에 이별을 했을 때 제주도로 떠나게 된 것도, 아마도 제주도의 작은 마을에 가서 살면 어린 시절 수유리 같은 낡고 허름하지만, 마음속을 따뜻함과 정겨움으로 가득 채워줄 동네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1년을 살았지만, 제주도에서 나의 어린 시절 마음속 동네와 같은 삶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제주도가 싫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 나름의 이유로, 제주도 살이를 한해살이로 마무리하고, 올 겨울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종로구 평창동의 작은 월세방에서 혼자살이를 시작했다.      


그럼, 내일부터 돌싱남의 <제주도 1년 살이 VS 서울 평창동 살이>에 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두 곳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제주도 성산 일출봉. 사진제공 : 제주 MBC에서 오랜 세월 교양 PD로 살고 있는, 제주 여인 김지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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