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안 Jun 22. 2024

나에게, 왜 스리랑카로 떠나냐고 묻는 그대에게 (1)

#1. 여름비


유난히 무덥던 2024년 6월 여름의 비가 내린다. 

여름의 비에 대해서는 추억이 많다. 특히 2020년 제주도에서 머물던 1년 중, 여름의 태풍과 비는 무척이나 사나웠다. 제주도의 사나웠던 비는 집채만 한 파도 위에도 마구 쏟아졌는데, 비가 내리는 날에는 해안가에 물끄러미 서서, 비의 무게에 밀려 파도가 바닷속으로 고개를 다시 처박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편 그런 매서운 비와 함께 휘몰아치던 바람이 참으로 시원하고 그립다는 생각도 했었다. 서울에서 아내와 함께 보냈던 스무 해 동안의 여름에 지켜봤을 20번의 소나기도 떠올렸다.     


어느 해 소나기가 내리던 여름에 아내는 창가로 들이치는 비를 피해 빨래를 급하게 걷고 있었고, 나는 방에 누워 실연에 빠진 젊은 베르테르처럼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때 아내는 내게, ‘첫사랑을 앓는 사춘기 소년처럼 슬퍼하고 있다’며 천진하게 웃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소나기가 내리면 떠오르곤 했던 대학시절에 잠시 만났던 그녀를 생각했었다.      


#2 이별     


2020년 2월에 서울 집과 MBC 직장을 갑자기 떠나 제주도에 1년간 머물렀던 건, 아내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이 훨씬 더 컸었고, 헤어지더라도 아내가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에 아내가 요구했던 이혼 조건에는 다 합의를 해주었다.      


우리가 헤어졌던 건, 매해 여름 소나기가 내릴 무렵이면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시 떠올릴 그런 추억이었고, 사실 그 당시에도 나는 그녀와 소나기를 피해 같은 우산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았던 거 외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었다.      


제주도에 머물던 여름 내내 ‘사춘기 소년’처럼 아내를 생각했었다. 착하던 아내가 신혼 초 내게 눈물을 보였을 때, ‘그 큰 눈에서 떨어지는 눈방울이 마치 탁구공처럼 굴러 내린다’는 생각을 했었고, 함께 외출을 하면 늘 내 손을 아프도록 꽉 쥐곤 했던 아내의 작은 손도 생각했었다.      


아내가 내게 ‘오빠는 말할 때 귀여워’라고 속삭이던 게 생각났고, 역시 비 오던 여름 내가 감자 수제비를 해주고 같이 작은 식탁에서 빗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후루룩 후루룩' 수제비를 떠먹던 기억도 떠올랐다.      


가을과 겨울의 기억이 없겠냐마는 우리는 유난히 여름에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놓고 시원한 소나기가 들이치는 걸 지켜보았다.      


#3. 홍콩      


내가 청춘이었던 시절의 젊은이들은 다들 홍콩 영화에 대한 그리움을 한 움큼씩 마음에 품고 산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죽은 혼령과 사랑에 빠진 장국영을 사랑했고(천녀유혼), 백 달러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던 영웅 주윤발에게(영웅본색) 열광했었다. 규화보전을 익혀 절세무공을 얻은 임청하를(동방불패) 자신의 연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머나먼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돈을 벌러 온 청순하던 모습의 장만옥을(첨밀밀) 잊지 못했었다.      


중국에는 3달 머물렀었다. 삼국지에 나오던 중국 전통의 향기와,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 유적지를 답사한다는 핑계를 댔었지만, 사실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도 실로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건, 광둥 성 홍콩에 간다는 다짐이었다.


광둥 성에 도착해서 성도인 광저우에는 1주일이 넘게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고속철도를 타면 홍콩까지 2시간이면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 명의 배낭여행객이 함께 머물던 허름한 10위안짜리 숙소에서 1주일 내내 내리던 광동의 소나기만 바라보았을 뿐 홍콩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지는 못했다. 그때만 해도 홍콩으로 가려면 비자 발급이 까다로웠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머물던 10인용 원룸 숙소에는 일본인 대학생 여럿과, 서양인도 몇이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방 문턱에 걸터 앉아 소나기를 바라보면서 홍콩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누곤 했다. 2시간만 기차를 타고 가면 구룡반도 골목 어딘가에서 주윤발이 담배를 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둥, 어느 식당에 가면 장만옥을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둥, 패왕별희를 감동적으로 봤는데 나는 장국영을 꼭 만날 거라는 얘기도.(당시는 1999년이었고 장국영이 그로부터 4년 후에 자살을 할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던 영화의 몇몇 장면들에 대해서도 떠올렸었다.    

  

아마도 이미 그 시절부터 시작되었을 거 같다.

매해 여름 소나기가 내리면 첫사랑과 그리움이라는 정서가 나를 휘감았던 건.      


#4. 스리랑카      


스리랑카와 방글라데시에 1달가량 머물렀던 건 1996년 여름이었다.
 
 ------------ (다음회에서 계속됩니다) --------------               


이전 09화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