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이 시작될 즈음이면
이승환의 [가을흔적]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이 노래에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습기가 가라앉아 건조하고 메마른 나뭇잎이
언제라도 부서져서 사라져 버릴 거 같은 느낌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런 느낌은 텅 비어 있는 존재의 쓸쓸함,
가을의 허전함 이별의 아픔 같은 감정과 함께
우리를 더 깊은 가을 속으로 이끈다.
MBC FM PD로 일할 때는
내가 그해 가을에,
우리 방송국에서 제일 먼저
이 노래를 트는 PD가 되고 싶어요
좀 이른 늦여름에 이 노래를 틀기도 했었다.
한 번은
<윤종신의 2시의 데이트>를 연출할 때
내가 이 노래를 선곡하니까
종신 DJ가,
“아! 매년 라디오에서 승환이 형의 이 노래가 들리면
가을이 왔다는 생각을 해요”
라고 말을 해서,
'역시 우리 DJ가 내 선곡 의도를 알
아 주는구나'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었다.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성시경, 김동률, 박효신, 이승환, 윤상 등의 발라드 곡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그런 사람들이
유독 MBC FM을 사랑해주기도 했었다.
당시에 내 곁을 지켜주던
(지금은 나를 떠난) 내 아내도
내가 퇴근하고 집엘 가면
“오늘 오빠 라디오에서 이승환 노래 잘 들었어 “
라고 말해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난
내 친한 친구는
본인은 절대로
‘우는 소리의 발라드’는
안 듣는단다. ㅎㅎ
나의 경우,
내 어린 시절 형이 사고로 죽고
우리 가족과 내 주위엔 온통 어둠만이 가득했었다.
내 유년기와 사춘기의 시간들은
늘 우울했고, 늘 불안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엔 자주 울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에겐 이승환의 [가을흔적] 같은 노래가
위로가 되었었다.
그리고 나는 어리석은 고집쟁이라서
라디오 연출을 할 때
주로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었다.
당시에 우리 방송국의 간부들은
PD의 자율성을 엄청나게 존중해 주었기에
PD가 어떤 노래를 선곡하던
그건 PD의 자율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었었다.
하지만 내 동기나
후배 PD들은 본인들이 좋아하는 노래보다도
청취자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 선곡하는
좋은 PD이자, 현명한 PD였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 역시
좀 더 폭넓은 선곡을 할거 같다.
그리고 내 친한 친구의 음악 취향과 관련해서는
누군가는 아픈 상처의 기억 때문에
슬픈 노래를 듣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나의 경우,
슬픔과 우울 속에 잠겨있는 동안
더 안정감을 느낀 경우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세상에는 많을 테니.
PS1. 늘 불안함에 침잠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의 우울함은,
그래서 나의 20대 막바지에 개봉했던
왕가위의 [중경삼림]이라는 영화를
그토록 좋아하게 만들었던 거 같다.
통조림의 유효기간을 세며
이별한 시간을 세어가던,
빗속 금성무의
슬픈 독백을 나는 사랑했었으니까.
PS2. 얼마 전 페이스북에 뜬 과거의 오늘 사진을 보니
'우리들은' 7년 전 오늘 파업을 했었다. 상당히 긴 파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 박근혜 정권은 MBC에 상당히 강도 높은 탄압을 했었으니까
우리들은 낮에는 시위를 하고 밤에는 함께
이런저런 펍을 찾아다니면서 함께 음악을 듣곤 했었는데,
신촌 어느 펍에서 이승환의 [가을 흔적]이 나오자
다 함께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현 정권도 여느 보수 정권이 늘 그랬던
MBC에 대해서 이런저런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된다.
과거의 동지들이 힘을 내서 지혜롭게 지금의 상황을 헤쳐나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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