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증언
어떤 철학은 세상을 설명하려 한다. 어떤 철학은 세상을 바꾸려 한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게 철학은 그보다 더 내밀한 것이었다. 그것은 살아내는 고통이자, 구원 없는 절망 속에서의 희망이었다. 그는 철학을 말하지 않고, 철학으로 자신의 삶을 찢어내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 앞에서도 진리를 버리지 않았듯,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사랑, 신앙, 글쓰기 모두를 철학 안에서 불태웠다. 그에게 철학은 학문이 아니라 실존의 고백이었다.
19세기 중반 유럽. 철학은 대학의 학문으로 굳어졌다. 헤겔은 체계의 거장을 꿈꿨고, 그 제자들은 역사와 윤리를 거대한 이성의 흐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
그는 자신을 코펜하겐의 이방인이라 불렀다. 교수직도 없었고, 제자도 없었다. 그의 철학은 강단이 아니라, 신문 칼럼과 수기, 익명 저작 속에서 조용히 흘렀다.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라기보다 편집광적인 종교 사상가로 보았지만, 그는 말한다:
“철학이 나를 구원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철학을 통해 내 절망을 말할 수 있었다.”
키에르케고르 철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있다. 그는 체계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고백하고, 변명하고, 사랑하고, 절망했다. 그의 철학은 익명 저작 속에서 자기를 감추면서 동시에 철저히 드러내는 ‘역설’의 언어로 가득하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병이라 했고, 『반복』에서는 이별한 연인을 통해 ‘반복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철학적 단편』에서는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 내려오는 사건을 말하며, 철학을 뒤흔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믿고 있는가?” “나는 신에게서 도망치고 있는가?”
그 모든 질문은 철학이 아니라 기도에 가까웠다.
소크라테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지. 철학은 나의 삶을 위한 것이었네. 그대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 "저에게 철학은 숨을 쉬는 고통입니다. 철학은 저를 병들게 했고, 동시에 저를 말하게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법정에서 죽음을 택했지만, 나의 마음은 평화로웠지. 그대는 왜 그렇게 절망에 매달렸는가?"
키에르케고르: "절망은 신의 그림자입니다. 신을 향한 열망이 없었다면, 저는 그렇게 절망하지도 않았겠지요."
소크라테스: "철학이란 말이 아닌 삶이라면, 그대는 철학자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나?"
키에르케고르: "저는 철학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철학이 저를 살게 했을 뿐입니다. 진리를 설명할 수 없어도, 진리로 인해 괴로울 수는 있었으니까요."
오늘날 철학은 다시 설명의 언어가 되고 있다. 논문으로, 토론으로, 해석으로. 하지만 삶의 절망 앞에서, 그런 철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유산은 하나다. 살아 있는 철학, 피 흘리는 철학.
그는 실패했고, 배척당했고, 이해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철학이 자기 삶의 피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 피는 오늘도 묻는다: 당신의 철학은 삶과 무관한가?
1) 철학은 단지 사고의 기술이 아니라, 실존의 길을 여는 방식입니다.
예: 삶에 있어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 철학은 단순한 조언이나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열어주는 내면의 거울이 됩니다.
2)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철학으로 존재했습니다.
예: 윤리나 논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절망, 사랑, 고독의 언어로 삶 그 자체를 드러냄으로써 철학자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3) 오늘날에도 철학은 삶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통로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예: 정신질환, 사회적 소외, 의미 상실의 시대에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은 단순한 개념이 아닌, 존재를 붙잡는 언어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마지막 10편에서는 "나는 결국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키에르케고르 실존 철학의 종착점을 성찰합니다. 철학이 아니라, 존재로 남는 사유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