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모메 Aug 29. 2022

l’m so hot

달밤에 번데기와 함께 춤을


그렇게 나는 자라면서 나의 몸을 부위 별로 하나하나 분해한 뒤,
다시 하나씩 빗금을 쳐가며 지워갔다.

 

 심리학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있다고 한다. 그 어린아이를 치유하고 보듬어주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마음속 어른아이는 아주 늘씬하고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피스룩을 입어도 엄마 옷을 뺏어 입은 것 같지 않은 그런 쓸쓸한 가을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 목은 기린처럼 길고 얼굴은 발레리나처럼 작고, 팔뚝에는 덜렁거리는 날개살이 없이 앙상하지만, 적당히 마른 근육이 있는 우아한 여자. 어깨와 쇄골은 시원하게 일자로 쭉 뻗어있으며, 가슴은 적당히 커서 너무 말라 보이지 않은 여자. 누가 보면 저 안에 장기가 다 있나 싶은 정도로 허리는 한 줌이지만 엉덩이는 둥근 사과 모양을 하고, 골반은 넓어서 육감적으로 느껴지는 여자. 젓가락처럼 쭉 뻗은 다리 아래 한 손으로 잡힐 것 같은 발목을 가진 여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보다 훨씬 구체적인 희망 사항을 가진 어른아이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보다 몸무게가 10킬로그램 아니 15킬로그램이 덜 나갔을 때도, 나는 나를 뚱뚱하다고 여겼다. 여름이 싫었던 열세 살이 생각난다. 정확히는 반소매를 입으면 보이는 통통한 팔이 너무 싫었다. 팔 살이 빠진다는 운동은 죄다 했지만 그대로였고, 그런 내 몸이 부끄러웠다. 조금 더 자라서는, 체크무늬 교복 치마 아래 당시 유행이던 회색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코끼리’ 같다는 말을 들었다. 또래보다 발목이 조금 굵은 편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다리 모양이 ‘일자 다리’니, ‘오다리’니 하며 친구들이 의견을 다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저 ‘일자 다리’로 결론이 나면 어른아이와 더 가까워지겠지 하는 수동적인 마음과 함께. 그 이후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게 되면, 발목과 무릎에 힘을 꽉 주어 다리를 있는 힘껏 일자로 보이도록 피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열여섯 살이 되던 무렵, 444라는 익명의 번호로부터 ‘역겨운 돼지 새끼’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 이후로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없고 웬 비곗덩어리 더러운 돼지 새끼가 보였다. (돼지야 미안) 누가 이 문자를 보낸 것일까,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는 마음은 덤이었다. 방학 내내 꿀꿀이죽 대신 수박만 먹으며 5킬로 감량에 성공했지만, 돼지가 사람이

되는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수박의 자리를 허벌라이프, 스페셜 케이가 대체했다.


 혹시 스무 살이 되면 짜잔-하고 내 안의 숨어있던 아름다운 어른아이가 튀어나올까 기대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자라면서 나의 몸을 부위 별로 하나하나 분해한 뒤, 다시 하나씩 빗금을 쳐가며 지워갔다. 그 시험지에 동그라미는 없었다. 답안지인 어른 아이와 비교하면 나는 모두 오답이었기 때문이다.


 재수하면서 강남의 한 대형 연기학원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식욕억제제를 처음 먹었다. 학원 근처의 어디 성형외과에 가면 쉽게 처방받을 수 있다더라 하는 말이 보물 지도처럼 은밀히 전해졌다. 그때의 우리는 온종일 샐러드만 먹고 몇 시간씩 땀이 나도록 트레이닝했지만, 더 말라지기 위해 약을 먹었다. 마치 침까지 모조리 뱉어 체급을 줄이는 복싱선수처럼. 약을 반 알만 먹으면, 맛집 거리가 즐비한 학원의 골목을 눈 하나 흘깃 안 하고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갑옷이 생겼다. 그 갑옷은 스스로가 식욕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알고 보니 그 약은 중추신경계를 각성시키고,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식욕을 억제하는 약이었다. 즉,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해 입맛을 뚝 떨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마약 대신 먹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알았다.


 이 약을 온라인에서 불법 거래한 사람들이 경찰에 수송되었는데, 59명 중 47명이 10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뼈밖에 남지 않아 스타킹이 남아도는 다리를 동경하고, 갈비뼈가 보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명 ’ 개 말라’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이러다 나중에는 미라가 미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닐까.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 참담했다. 아니 과거의 내 모습은 달랐나? 이렇게 몸과 관련된 기억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용산 아이맥스처럼 고화질로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그때 내가 다른 것을 기억하는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누군가가 나를 평가할 때, 그것에 맞추는 대신 맞서 싸웠다면.

 

 이 이야기가 정말 무서운 것은 하나의 결핍에 몰두하면, 자신을 완성된 인간으로 바라볼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완벽한 몸매가 되기 전까지는 성공할 자격도, 사랑받을 자격도 없는 미완성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빼고 모두가 온전하고 완벽해 보였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은 어떤 의사결정도 내릴 수 없다. 그렇게 수능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살이 빠지면 본격적으로 나의 삶을 살아야지 하며 중요한 것들을 그다음으로 끊임없이 미뤘다. 이 시간 동안 얻은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타인의 눈이었다.


 그런데 어제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분명 저번 주까지 무기력에 져서 우울에 빠져있던 나인데, 갑자기 거울 속의 모습이 예뻐 보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산책하러 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공기에선 은은한 달콤함까지 느껴졌다. 마녀의 저주라도 풀린 건가?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볼 대신 덜렁거리는 팔을 꼬집어보지만 그대로다. 삐져나온 옆구리까지 확인하니 안심이 된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사이 바뀐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브런치 작가 합격 메일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내게 합격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순수한 나의 노력만으로 원하던 무언가를 쟁취한 경험이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보호하는 갑옷은 수박도, 단백질 셰이크도, 식욕억제제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작은 성취감이었다. 만약 자신의 몸을 한평생 혐오하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조금 늦었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과거의 내가 내 손을 놓는 선택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하면 된다고. 나를 지키는 선택 말이다.


 이제 자기혐오라는 문을 열고 나갈 준비가 되었다. 이 사실은 평생 고군분투해서 쟁취한 것이라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무기력을 걸으며 가장 크게 바뀐 생각이 있다면 바로 삶에 대한 확신이다. 나는 내가 늘 우울하고 죽음과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누구보다 잘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살기로 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러니 이 지겨운 자책과도 이별할 때이다. 평생 함께할 나인데 예뻐해 주며 살기도 짧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를 인정하니 돌볼 힘도 생긴다. 당장 나비가 될 수는 없더라도, 내가 만들어지는 이 시간을 즐기며 당당한 번데기가 되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