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혜미 Oct 10. 2022

네트를 넘겨라


앞에서 커트는 사춘기 육아와 닮아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커트와 사춘기 육아의 목표는 무엇일까? (사춘기 육아의 목표라니요. 목표라는 걸 세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가요 물어보신다면 그 분함과 어이없음을 한 번만 꾹 참고 글을 읽어보시라 권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거대하고 무거운 목표가 아닐 수 있으니 말이다.)


커트의 목표는 바로 네트를 넘기는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거나, 부드럽게 회유하는 듯 넘어가 생각하지 못했던 곳으로 파고들거나, 상대가 실소를 터트릴 만큼 짧은 공으로 한 점을 거저먹는 것. 이 모든 것은 커트의 목표가 아니다. 커트의 목표는 그저 네트를 넘기는 것이다. 


커트는 나에게 넘어온 공으로 점수를 얻어내겠다는 포부로는 칠 수 없다.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돌면서 나에게 돌진해오는 공을 일단은 받아 네트를 넘기는 것. 커트의 작고 소박한 목표다.


그렇다면 사춘기의 목표는 무엇인가. 네트를 넘기듯 오늘 하루를 잘 넘기는 것이다. 무책임하다고, 육아를 그렇게 단편적으로 좁게 봐라 볼 일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겠다.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건지, 나에겐 오늘 내 눈앞에 있는 아이와 오늘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오늘 내 눈앞에 있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오늘 너를 이기려 하지 않고 오늘 너를 굴복시키지 않고, 그렇다고 회유하며 웃게 만들지도 않고 그저 오늘을 잘 넘기는 것. 그것이 사춘기 육아의 목표다. 


어쩌면 커트는 가장 겸손한 기술이고 사춘기 아이와 오늘을 넘기는 건 인생과 육아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행위가 아닐까. 흔들흔들 거리는,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너와 나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늘을 잘 넘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사춘기 육아를 직면할 때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목표다. 그렇게 잘 넘긴 하루하루가 모이면 어느새 이 시기가 지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너와 웃으며 공을 주고받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욕심을 조금 넣어두자. 때론 욕심인지, 교만인지 모를 경계선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 조금은 더 여유롭고 겸손하게 오늘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사춘기 육아에서 가장 필요한 건 겸손이다. 매일 흔들리는 너를 내가 어찌할 수 없겠다 인정하는 겸손, 너를 이기는 양육자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고 믿어주는 양육자가 되어야겠다는 겸손. 너의 인생에서 내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건 없으니 나는 너에게 삶을 짊어질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는 것뿐이겠구나 인정하는 겸손, 당장 내일의 삶도 불확실한 우리네 인생이니 오늘 너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오늘을 잘 보내야겠다는 겸손. 이 모든 겸손이 사춘기 육아를 살게 할 것이고 오늘을 넘기게 할 것이다. 


이전 07화 거꾸로 도는 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