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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기에 힘써야 하는 이유

배우는 사람은 결코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

by 권석준 Seok Joon Kwon


저보다 연배는 한참 높으시지만 (+16?), 생각은 늘 같은 힐버트 공간에서 공명하는, 인하대 물리학과 핵 (or 입자)물리학자 김현철 교수님은,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온오프라인 지인 중, 제가 감히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저는 그럴 깜이 됩니다 (feat. 노무현 전 대통령). 저는 김현철 교수님 같은 분을 친구로 두었습니다. 김 교수님은 실로 제가 나이 들어 사귄 친구 중 가장 존경하는 친구 중 한 분입니다. 늘 배울 점이 많은 분입니다. 그래서 더욱 몸도 마음도 건강하시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야 계속 같이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과 학문을 논하고 세계관을 확장시킬 수 있으니까요.


각설하고, 김 교수님의 담벼락에서 좋은 말씀을 캐치하여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나라 물리학계의 스타 작가이자 강연자, 그리고 양자물리학 덕후이기도 한 김상욱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리학이라면 무엇이든 다 배워야 해요. 나중에 어떤 연구 분야를 내가 하느냐 못하느냐는 결국 어렸을 때 내가 무엇을 배웠느냐 배우지 못했느냐로 결정돼요.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분명히, 일천한 수준이긴 합니다만, 지금까지 제가 쌓아 온 학문과 공부로써 그 증거 자료를 제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또 다른 학부-박사 선배 임창훈 박사님의 전철을 밟아, 저는 학부 때 본래 전공인 화학 공학은 잠시 뒤로 젖혀 두고 (그래서 학점이 그 모양..), 3학년 때부터 물리학을 부전공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학점이 그 모양...). 차마 물리학 복수 전공까지는 못 했는데, 왠지 제 미천한 실력으로 물리학을 복수 전공까지 하면 졸업이 2년 이상 늦어질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물리학과에서 정말 많은 과목을 배웠습니다. 고체물리학, 광학, 전자기학, 양자물리 1,2, 통계물리학 등, 화공과에서는 거의 배우지 않거나 배우더라도 겉핥기로 넘어가는 과목들을 배웠죠. 물론 물리학과 3학년들과 같은 선 상에서 경쟁하기란 매우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에 초반에 이를 따라가는 것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과장 하나도 안 하고, 코피 터지게 도서관에서 밤새며 공부했습니다. '내 머리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배운 학문들이 지금의 제 연구에 정말 많이 도움이 됩니다. 전자기학과 광학, 양자역학이 제가 지금 연구하는 포토닉스 (photonics)와 플라즈모닉스 (plasmonics)는 물론, 근미래에 연구할 광컴퓨터 (optical computer)와 향후 연구하고픈 양자컴퓨터/양자정보과학 (quantum computer/quantum informatics) 연구의 근간이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통계물리학은 미시 (micro scale)와 거시 (macro scale)를 연결해 주는 도구가 되어 주었다는 점에서, 패턴의 과학에 꽂혀 있던 제게 가장 튼튼한 동아줄로 다가왔습니다. 나노 스케일의 재료에 대한 물리화학과 화학물리적 특성을 연구하는 제게 고체물리학은 가장 튼튼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비록 이론물리학자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어려운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든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현상에 대한 모델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수리물리학의 여러 도구들, 계산물리학의 알고리듬들이 큰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는 비단 물리학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한 후에도, 저는 여전히 화학 공학 과목은 전필만 채우고, 나머지 인접 전공의 과목을 미친 듯이 수강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청강했습니다. 전자과에서는 이미지 처리와 분석, stochastic process, synthetic biology 등을 들었는데, 이는 나중에 바이오메디컬 소자의 신호 해석과 분리, 합성과 노이즈 제거, TEM/SEM 같은 전자현미경 이미지 처리 및 그로부터의 새로운 정보 창출 등의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사 졸업을 위해 과에서 요구한 부전공은 재료 과학을 선택했는데, 여기서 배운 고분자 물리학, 자성재료학, 재료역학, 재료열역학, 상전이/상분리는 이후 유기태양전지의 벌크헤테로정션 (BHJ) 모델링, Kinetic Monte Carlo (KMC) 같은 분자 시뮬레이션 기법의 체화, 블록공중합체 (block-copolymer)의 상분리에 의한 자기조립 패턴 등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화학과에서 배운 비평형열역학과 분자동역학은 불안정한 상의 박막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고, 물리학과에서 배운 통계물리학은 보다 깊은 레벨에서의 자기조립/자기조직 현상에 대한 이해, 임계 현상 (critical phenomena)에 대한 이해, 액체-기체의 성질에 대한 이해를 북돋았으며, 생물학과에서 배운 시스템 생물학과 분자 생물학은 제가 그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었습니다. 경영학과에서 살짝 청강한 데이터 과학은 데이터를 수학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알게 해 주었고, 본진인 화공과에서 배운 과목들은 과학적 연구 성과가 어떻게 공학적 가치 창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2012년 여름,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 위치한 고등과학원 (Institute for Advance Study, IAS)에서의 여름물리학교 경험은 정말 제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박사 졸업을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한 제 지도교수의 배려로 저는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온 계산물리학 관련 박사과정 학생들과 같이 알버트 아인슈타인, 쿠르트 괴델, 폰 노이만 같은 선현들이 걸었던 교정을 걸으며 그들과 합숙하며 집중해서 공부했던 행복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프로그램은 PiTP (Program in Theoretical Physics)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해의 주제는 계산물리학을 이용하여 생명 현상과 복잡계를 해석하는 다양한 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계산물리학자들과 관련 분야 공학자들이 모여 그 분야를 전공하는 박사과정 학생들과 합숙하며 공동 프로젝트도 하고 원포인트 레슨도 받고, 과제와 발표를 거듭하면서 실로 이 분야에 할 연구거리가 무궁무진하여,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계산과학 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배운 advanced KMC 같은 분자 레벨에서의 확률론적 동역학 모델링 방법, L-system 같은 IFS (iternative functional system), functional analysis, K-means clustering/SVM 등의 데이터 해석 및 모델링 방법, Lattice-Boltzman modeling 유체 모델링 방법 등은 제게 큰 연구 자산이 되었고, 지금도 다양한 계산과학 연구를 함에 있어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가 이런 다양한 과목들을 공부하고 학습하는 당시에는, 나중에 연구자로서 어떤 연구를 하게 될지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전혀'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이러한 방법론들, 개념들, 이론들, 위험한 가설과 데이터들, 그리고 쌓인 경험치가 도대체 어떻게 구체적인 연구 주제로 연결될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이죠. 예를 들어 박사과정 때 연구하던 KMC는 콜로이드 상의 상분리를 미시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공부하던 시뮬레이션 연구 방법론이었는데, 지금은 금 나노입자의 2차원 자기조립 패턴에서 무질서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는 방법론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학부 때 열심히 공부하던 전자기학과 광학은 박사 후, 현 회사로 복직했을 때 갑자기 제 앞에 떨어진 포토닉스/플라즈모닉스 연구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을 수 있던 장대가 되어 주었죠. 전자과에서 배운 이미지 처리는 많은 연구자들과 협업을 할 때 그렇게나 훌륭한 방법론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화학과에서 배운 비평형열역학과 물리학과에서 배운 통계물리학은 블록공중합체 같은 연성 물질 (soft matter)의 물리학을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좋은 기반이 되기도 했죠.


제 경험에 비춰본 것일 뿐이지만, 실로 저는 재차


나중에 어떤 연구 분야를 내가 하느냐 못하느냐는 결국 어렸을 때 내가 무엇을 배웠느냐 배우지 못했느냐로 결정돼요.


라는 김상욱 교수님, 그리고 이를 다시 리마인드 하신 김현철 교수님 말씀에 십분 동감하고, 이를 학문의 길을 걷고 있는 후학들에게 전해 주고 싶습니다.


물리학이 아니더라도, 학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 젊었을 때, 머리가 싱싱할 때, 마음이 열려있을 때, 세상의 풍파로 덜 찌들었을 때, 도전정신이 살아 있을 때, 몇 날 밤을 새도 다음날 아침에 쌩쌩할 수 있을 때, 술로 밤새도 다음 날 다시 연구할 수 있을 때, 그럴 황금 시절에 하고 싶은 공부, 배우고 싶은 학문을 최대한 많이 접하고 빠져 들어 보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21세기의 학문을 논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학부 전공이란 결국 행정적인 분류의 편의일 뿐이고, 박사 때 연구 주제란, 학위를 받기 위한 필수 요건에 지나지 않으며, 포닥 때의 연구 주제란, 독립된 학자의 길을 걷기 위한 연습 문제에 머무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제든 장기적으로 하든 단기적으로 하든, 최대한 다양한 학문들에 대해 맛이라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학문이 제공하는 토대가 괜찮겠다 싶으면 더 깊이 들어가서 A-Z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어떤 연구 주제가 자신의 앞에 닥쳐왔고, 그것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 혹은 그것을 꼭 하고 싶은 상황인데, 자신의 지식과 실력이 일천하여 망설이게 되면, 결국 그 주제는 다른 더 적합한 사람에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연구 주제가 사치재 같은 한정품은 아니지만, 마치 제한된 시간 내에 구입하지 않으면 금방 동이 나는 재화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고, 과제 RFP가 뜨면 경쟁률이 치솟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감사하게도 자신에게 의지와 돈이 있다면 그 한정품을 구입할 수 있겠지만, 불운하게도 자신에게 의지와 돈이 없다면 그 한정품이 다른 사람에게 가게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겠죠. 예전에 용돈이 부족하던 어린 시절, 꼭 가지고 싶은 레고 세트를 사기 위해 푼돈을 모았지만, 어느 날 매대에서 그 세트가 사라져 버린 것을 보았을 때 느꼈던 허탈감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실로 학자로서 자신의 내공과 지식이 부족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 주제 속으로 '제때'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학부나 박사과정 시절이 아니더라도, 학자라면 평생 학생의 자세로 살아야 하니,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고, 연구 주제를 위해서라면 그것에 해당하는 새로운 분야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공부, 같은 난이도라고 해도,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것은 원숙미가 더해져서 다양한 시각으로 그 학문을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학문의 일정 깊이 이상으로 들어가는 것에는 훨씬 더 많인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미 다른 연구 주제들, 다른 일들, 육아와 사회생활로 시간이 많지 않은 학자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덜 얽매여 있고, 비록 돈은 없지만 시간이 있고, 지위는 없지만 체력이 있으며, 자리는 없지만 의지가 가득한 시절에 자신의 창고를 가득 채워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학문할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좌고우면 하지 않고 잡을 수 있습니다.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메타판단 역시 자신의 학문 수준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므로, 많이 공부하고 많이 자신의 것으로 채워 넣은 사람들이 결국 그러한 성찰에서도 덜 실수하여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의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시야를 더 잘 갖게 될 것입니다.


공부란 그런 것입니다.


당장의 효용이 없더라도,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내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더라도, 결국 그것이 필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디딤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디딤돌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꼭 그 기회에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배울 기회가 있다면 꼭 그 기회에 자신의 돈과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다양한 관점과 배경을 가진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다면 꼭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제대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가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주변에 물어보아야 하는데, 기성세대가 된 시점과 학생일 때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많이 차이 납니다. 기성세대는 심적인 두려움과 압박으로 질문을 잘 못 합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약점을 보이기 싫어하는 좁은 시야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생은 그것이 전혀 약점이 아닙니다. 학생에게는 물어볼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특권을 갖추고 있는 시절에는, 꼭 특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행사하지 않는 특권은 평생 사용하지 않고 찬장에 전시하는 찻잔과 같습니다.


학생의 특권이란 그런 것입니다.


학자의 커리어를 꿈꾸는 학부생들, 대학원생들이 있다면, 보잘것없는 제가 감히 충언드리건대, 자신에게 다가 올 학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다양한 학문과 방법론, 그리고 다양한 학문적 백그라운드를 가지신 분들과의 만남을 폐하지 마시고 더 적극적으로 빈도를 늘려 가시기를 권합니다. 그것이 10년 후, 20년 후, 여러분의 학문적 커리어의 풍성함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점이 되었을 때, 그다음으로 오는 당신들의 후속 세대를 위해 좋은 멘토가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조언을 구한다면,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 알려 주시고, 어떻게 그 분야를 헤쳐나가면 좋을지 지혜를 나눠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나이 들어 병들고 결국 매일 죽음이라는 정해진 길을 따라 가지만, 학문은 그 학문을 계속하는 사람이 있는 한, 결코 죽음에 이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가장 인간다운 행위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grown-up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growing 하는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선물입니다. 학생일 때도, 그리고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도 growing 하는 것이 학자의 특권입니다.


"The great thing about being a scientist is you never have to grow up."

-Neil Degrasse Ty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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