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은 나의 미래 동료다.
나는 학교에 있지 않기 때문에 랩에 막 두 자릿수 대학원생이 넘실대는 연구 책임자는 아니지만, 국내외 훌륭하신 공동연구자들이 많이 계셔서 좋은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좋은 연구 성과들도 꾸준히 나와서 연구자로서 보람이 크다. 그런 기회를 주시는 국내외 동료분들께 늘 감사할 따름이다. 나 홀로 연구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는 점점 경쟁이 극심해져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잘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각자 잘하는 것을 모아 더 큰 목표를 이루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좋아 보인다.
좋은 연구 성과가 논문이든 특허든, 어떤 형태로 나오든 그것은 1차적으로 연구자에게 보람과 만족감을 주는데, 2차적으로 요즘 느끼는 행복감은 똘똘한 후학들이 나와 같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공동 연구자들이 대개 연구중심대학의 신진-중견급 교수님들이라, 그 밑에서 일하는 대학원생들, 특히 박사 과정 학생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일이 많이 있다. 지금도 대략 각 학교에서 8명 정도의 학생들과 직접적으로 연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들을 직간접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보통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이 학생들은 정말 내가 그들 나이 때였을 때에 비하면 훨씬 적극적이고 열심이다. 실험도 잘하고, 스스로 정보를 찾아 이해하려는 욕구가 충만해 보인다. 그런데 지난 몇 년 간 박사 과정 학생들과 일을 해 보니, 이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워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박사 과정 학생들이 아마도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데이터 생산이나 실험, 논문에 들어갈 그림 만드는 것이나 학회에서의 발표보다는, 모아 놓은 데이터를 논문으로 만드는 과정인 것 같다. 좁게는 영어로 글을 써야 한다는 테크니컬 한 문제로 인한 난점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넓게 보면, 이는 영어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논문이라는 형식의 글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즉, 데이터를 정리하여 글로 바꾸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 한, 한 마디로 말해, 글쓰기 기술 부족의 문제다.
몇 달 전, 어떤 학생을 책상 앞에 두고 복잡한 데이터를 같이 보면서 이를 어떻게 논문으로 작성할 것인지를 토의하며 학생을 1:1로 지도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그 학생과 나눈 대화를 복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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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 데이터는 다 모았는데, 그다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빨리 논문을 써야 하는데 갑갑합니다.
선생 : 이미 데이터는 훌륭하니까, 이제 자신감을 가지고 페이퍼를 써 보세요.
학생 : 데이터를 어떻게 배치하고 거기서부터 어떻게 논문을 이어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를 않아요.
선생 : 영어로 글쓰기가 어려워서 그런가요?
학생 : 그것도 있겠지만,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선생 : 그렇다면 일단 데이터를 어떻게 보여 줄 것인지 같이 고민해 볼까요? 일단 Figure 1에서는 이 연구의 대략적인 동기와 개념을 보이려 하고 있죠. 그렇다면 Figure 1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어떻게 썰을 풀어야 할까요?
학생 : Figure 1은 이렇다 저렇다 라고 묘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선생 : 그건 너무 단순하죠. 그러면 이건 논문이 아니라 그냥 실험보고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논문을 읽는 사람들은 단순한 묘사를 원하지 않아요. 그 이상을 원하죠.
학생 : 그것이 무엇일까요?
선생 : 읽는 이들은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저자들의 의도와 맥락을 보기를 원해요. 하고 많은 시스템 중에 왜 이 시스템이냐, 왜 이 소재냐, 왜 이런 방식이냐, 왜 이런 방향이냐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당성이 있는 근거를 찾기 원하는 거죠. 그림들은 그러한 정당성을 서술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에요.
학생 : 그러면 이 그림에 대해서 서론에 부분에서 충분히 조금이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네요.
선생 : 그렇죠. 서론은 장식품이 아니에요.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은 서론을 깔때기처럼 쓰라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학생이 전기화학 기술 기반으로 이산화탄소 저감 신기술을 만들어낸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써 본다고 가정해 보죠. 그렇다면 서론은 전기화학 이야기로 시작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독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대략 이렇게 흘러가면 좋겠죠.
"A. 인간이 추가적으로 배출하고 있는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서 매년 급증함으로 인해 지구 기후 위기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B. 이러한 이산화탄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만큼, 이미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거나 제거하는 기술도 매우 중요하다. C. 그런데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은 a, b, c, 가 있고, 그중 산업적으로는 전기화학적인 방식이 제일 무난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D. 하지만 전기화학적 방식에는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고, 이는 더 상업적인 수준에서 원가를 낮추며 널리 보급되는데 장벽이 되고 있다. E. 이를 위해 최근에는 이러저러한 기술이 제안되었이지만, 저러 이러한 한계가 여전히 남아 있다. F. 그래서 우리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전기화학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을 개발했다. G. 이 기술은 대략 이러저러한 소재와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는데, Figure 1a에 이에 대한 개념을 대략 보였다."
어떤가요? 깔때기가 느껴지나요?
학생 : 예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선생 : 결론에서는 깔때기를 뒤집으면 됩니다.
학생 : 어떻게요?
선생 : 좁은 데서 넓은 데로 나가는 것이죠.
"A. 우리는 이러저러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신기술을 만들어 냈다. B. 테스트해 보니 확실이 이러저러한 장점이 있었다. C. 이를 기반으로 기술이 이산화탄소 포집 분야에 더 널리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D. 이는 지구 기후 위기 대응뿐만 아니라,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것을 넘어 산업적 재활용할 수 있는 힌트도 주기 때문에 시의적절하다."
어떤가요? 역방향 깔때기 느껴지나요?
학생 : 예 어떤 느낌인지 잘 알겠습니다.
선생 : 분야에 상관없이 이 구조를 잘 익혀두면, 독자들을 연구로 집중시키고, 다시 논문 말미에 독자들에게 더 큰 맥락에서의 연구 의미를 되새기게 해 주는 환기 효과를 줄 수 있습니다.
학생 : 그럼 본문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선생 : 기본적으로 본문은 이미 머릿속에 플롯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드라마 작가라고 생각해야 해요. Scene이 여러 개 중첩되거나 이어지면서 드라마가 흘러가잖아요?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플롯의 핵심을 이뤄가죠. 마찬가지로 논문도 계속 scene이 바뀌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데이터들이 등장하며 이들이 날줄 씨줄처럼 얽힌 관계가 플롯을 이룹니다.
학생 : 그러면 플롯을 먼저 짜고 그림들의 배치를 구상하면 좋겠네요.
선생 : 그렇죠. 그래서 보통 편하게 논문 쓰고 싶으면 그림 파일을 먼저 만들라는 이야기를 하죠.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림 파일 만드는 그 자체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머릿속에 이미 장면의 전환들이 구상되고 계산되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아까 이야기했던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을 다시 가져와 봅시다. 학생이라면 어떻게 Figure 1을 채울 것 같아요?
학생 : 일단 Figure 1a에서 보인 것을 뒷받침하는 보조 핵심 데이터를 추가할 것 같습니다.
선생 : 좋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그림 안에 있는 데이터들은 서로의 연결 관계가 명확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림들이 별로 관련성이 없는데 중구난방으로 같이 묶여 있으면 산만해지고, 독자들의 주의가 흩어집니다.
학생 : 그러면 어떻게 데이터들 간의 연결성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요?
선생 : 그 부분이 연구 논문의 핵심이죠. 그림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바로 문장과 문단으로 전달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접속사를 잘 활용하는 것이죠. 접속사라고 해서 However, Nevertheless, Although, In contrast 같은 문법적인 흔한 접속사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쏠쏠하게 활용해야 하는 접속사는 이것 말고도 많이 있어요. 그리고 굳이 영어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예를 들어 보죠.
"Fig1a에서 보인 우리의 제안 시스템은 그물망 구조를 이루고 있음이 확실한데, 이는 Fig1b의 SEM 이미지에 잘 보이고 있다. 내부에 원소분포는 FIg1 c EDAX data에 잘 보이고 있다. 제안된 시스템은 촉매들이 고르게 분산된 나노 pore 구조의 네트워크 형상을 가지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는 이러저러한 것이다. 이산화탄소의 표면 흡착 단계에서 이들이 하는 역할은 매우 지대하다. 이들은 단위 시간당 어쩌고 저쩌고를 할 수 있다."
와
"Fig1a에서 보인 우리의 제안 시스템은 '실제로' 그물망 구조를 이루고 있음이 확실한데, 이는 Fig1b의 SEM 이미지에'도' 잘 보이고 있다. 내부에 원소분포는 FIg1 c EDAX data에'서도' 잘 보이고 있다. '이를 종합하건대, ' 제안된 시스템은 '실제로' 촉매들이 고르게 분산된 나노 pore 구조의 네트워크 형상을 가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저러한 것이다. '특히, ' 이산화탄소의 표면 흡착 단계에서 이들이 하는 역할은 매우 지대하다. '다시 말해, ' 이들은 단위 시간당 어쩌고 저쩌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를 비교해 보세요.
어떤가요?
학생 : 흐름이 보입니다.
선생 : 여기서 흐름을 만들어 낸 것은 문장을 이어 준 접속 표현들 혹은 문장 안에 있던 강조 표현들입니다. 예를 들어, '도', '서도', '이를 종합하건대',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특히', '다시 말해', 같은 표현들이 넓게 보면 다 접속사예요. 문법적으로는 이들이 '접속사'는 아니겠지만, 넓게 보면 문장을 부드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있으므로 결국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더 공을 들여야 해요. 그래야 논문의 가독성이 높아지고 독자들이 계속 흥미를 가지며 다음 단계를 기대하게 됩니다.
학생 : 그러면 Fig1에서 Fig2로 전환하는 것은 어떻게 하나요?
선생 : 좋은 질문입니다. 그림이 바뀌면 scene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가 이어지되, 조금 다른 장면이 나와야 하는 것이겠죠. Fig1에서 시스템의 대략적인 구조와 특성을 설명했다면, Fig2에서는 이 시스템이 정말 그렇제 작동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증거 데이터를 차곡차곡 보여 줘야 합니다. 증거 데이터의 결에 따라 Figure가 바뀔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Fig2에서는 이산화탄소 농도의 저감 다이내믹스 플롯과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잘 실어야겠죠. Fig.3에서는 왜 그런 일이 가능한지를 scientific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저널이 scientific mechanism or explanation을 강하게 요구하지 않지만, 좋은 저널 들일수록, 저자들의 과학적 사고에 의한 논리적 설명을 요구하죠. 가장 좋은 방법은 가설의 바탕을 이루는 이론을 수학적으로 검증하고, 가설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보여 주며, 가설에서 예상되는 예측 결과를 다른 실험으로 재차 확인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결에 맞춰 그림으로 나누면 됩니다.
학생 : 그런 수학적 설명이나 이론적 모델링이 어려우면 어떻게 하나요?
선생 : 그런 경우라면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논리적 흐름을 최대한 만들어야겠죠. 예를 들어 연못 세 군데 중 한 군데에 왕잉어가 사는데, 어떤 연못에 사는지 알고 싶다면, 연못물을 다 퍼내는 방법도 있지만, 특정한 연못 두 군 데에 그 잉어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방법도 있rpT죠. 그런데 명심할 것은,
"특별한 주장은 특별한 증거를 요구한다."
는 기본적인 과학 연구의 명제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연못에 잉어가 없다는 것은 어떤 분야에서는 매우 특별한 주장이 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을 누가 봐도 믿을 수 있게끔 다각도에서 조명하고 증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증명이 스스로를 말할 수 있게 데이터를 확보하여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죠.
학생 :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논문이 다소 늘어지는 경우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선생 : 그것도 좋은 질문입니다. 어떤 논문이든 늘어지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면 기본적으로 novelty가 있어야 해요. 그것이 크든 작든지요. 이왕이면 큰 novelty가 있으면 좋겠죠. 그것은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세상에 없던 것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기존에 이러저러한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뛰어넘는 것을 보여 주면 좋겠죠. 이때 기술을 잘해야 합니다. 내 것이 최고라는 식으로 뉘앙스를 가져가면 안 되고, new, novel, disruptive, best, most, 이런 한정사의 사용을 가급적 자제해야 합니다. 저자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죠. 대신, 충분히 개선되었고 competitive 하다, better than, more, relatively advanced 같은 표현을 조심스럽게 고르면 되겠죠. 이러한 표현을 통해 논문의 핵심 novelty가 점점 고조되어 디스커션에서 결실이 맺히도록, 즉, 핵심 주장이 자연스럽게 파이널 무대에 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거죠.
학생 : 그럼 디스커션에서는 어떤 내용을 써야 할까요?
선생 : 요즘엔 디스커션을 따로 분리하는 저널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써야 한다면 단순한 summary 그 이상을 써야 합니다. 디스커션에서는 이 연구가 가진 함의를 조금 더 종합적으로 논해야 해요. 예를 들면 이렇죠.
"이러저러한 시스템을 만들어서 테스트를 했고 확실이 이전보다 좋은 성능이 나왔으며, 이는 앞서 밝혔든 이러저러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라고 일단 한 번 대략 정리해 주고,
"이것이 맞다면 결국 이 메커니즘을 확장하여 이러저러한 분야의 문제가 해결 가능성의 실마리를 가질 것이고, 다른 재료를 쓴다면 이런저런 성능의 향상도 기대할 수 있다."
같은 향후 주제를 제시하는 동시에,
"그러나 연구에서 이러저러한 부분은 여전히 확실하게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고, 후속 연구가 필요하며, 이러저러한 부분은 여전히 물질적인 한계로 남아 있다."
같은 한계의 인정, 그리고,
"향후 이 분야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발전을 거듭할 것이고, 이 연구는 그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같은 perspective 제시가 필요합니다. 그 외, 논문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떨어지지만, 추가로 덧붙이면 좋을만한 정보들을 하단에 붙이는 것도 괜찮습니다.
학생 : 결론은 아까 말씀하신 역깔때기로 가면 되겠군요.
선생 : 그렇습니다. 디스커션에서 논한 내용을 역깔때기로 재배치하되, 문장을 좀 새롭고 신선하게 쓰면 좋습니다. 했던 말 반복하라고 결론이 있는 것은 아니죠. 자신 없으면 그냥 단순한 summary 쓴다고 생각하고 써도 되지만, 그럼 좀 아깝죠.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줄 수 있는 기회니까요.
학생 : 말씀하신 내용은 잘 알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내용을 막상 영어로 쓸려고 하면 키보드 위에서 한참 멍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선생 : 매우 중요한 부분이에요. 학생들은 논문 쓸 때 무조건 영어로 먼저 써야 한다고 압박감을 갖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사람의 사고방식은 대부분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모국어로 흘러갑니다. 모국어가 익숙하면 모국어로 논문을 쓰는 것도 당연히 제일 자연스러운 거예요. 논문은, 재차 강조하지만 생각의 흐름을 부드럽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흐름과 논리가 없어지면 그건 논문이 아니에요. 그냥 보고서 용 문장의 나열일 뿐이지. 그 과정에 영어가 장애물로 작용한다면 굳이 영어로 논문을 시작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모국어로 플롯을 짜시고, 흐름을 만드시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google translate 같은 도구로 영어로 바꿔 보신 다음, 스스로 고쳐 보세요. 그리고 고친 영문을 다시 국문으로 역 translate 해 보시고 이것이 제대로 내가 의미했던 문장인지 복기해 보세요. 이 왔다 갔다의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꽤 그럴듯한 영어 논문 용 문장이 됩니다. 어차피 지도교수와 초안을 가지고 계속 고치게 될 텐데, 이 정도까지만 만들어 와도 지도교수와 논문 교정하는 것이 상당히 편해져요.
학생 : 하지만 구글을 쓰면 가끔은 좀 이상하게 번역되는 경우가 있어요.
선생 : 그래서 좋은 논문을 많이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보통 우리가 좋은 저널이라고 부른 저널에 출판되는 논문은 데이터도 훌륭하지만 글 자체도 훌륭한 경우가 많아요. 이미 수많은 교정과 편집을 거치기도 했으려니와, 그 분야에서 업력이 높은 연구자들이 갈고닦은 표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논문을 자주 읽으면서 좋은 표현들이 있다면 어딘가에 기록해두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공계 논문 용 영어 표현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인문사회 분야에 비하면 말이죠. 모으다 보면 자주 보이는 표현들이 있을 것이고, 그 가짓수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예요. 레고 블록 충분히 모으면 좋은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충분히 그런 표현을 모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목적에 맞게 고치면서 응용하면 자신의 좋은 문장이 됩니다. 물론 이를 위해 시간을 들여 연습해야 하는데, 박사 과정이라는 기간은 이러한 연습을 해야 하는 기간이기도 하죠. 필요하다면 교정용 원고를 외부 교정 업체를 통해 보다 전문적으로 교정하는 옵션도 있죠.
학생 : 잘 알겠습니다.
선생 : 그리고 생각이나 아이디어들을 글로 옮기기 전에, 믿을만한 동료들, 혹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자신을 잘 이해해 주고 조언을 줄 수 있는 친한 사람들 앞에서 말로 설명하는 기회도 가져 보세요. 중요한 것은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의외로 핵심 아이디어를 말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허점이 무엇인지,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그간 대충 지나친 것 중에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글은 주로 문어체를 따르게 되는데, 말은 구어체를 따르고, 자신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연구의 개념이 재포장되는 과정을 겪기 때문이죠. 그룹 미팅에서 발표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지만, 격의 없이 자유롭게 떠드는 자리에서도 신나게 설명하다 보면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플롯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학생 : 소통의 중요성이네요.
선생 : 그렇죠. 과학이나 기술 연구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수다스러워야 해요. 잡담을 많이 나누고, 짧지만 즐거운 토론을 자꾸 즐겨해야 합니다. 남을 함부로 비판하면 안 되지만, 어떤 코멘트이든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이를 오히려 자신의 내공을 키우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개인보다 우수한 집단 지성의 힘을 믿어야 하고, 집단 전체에 대해서는 자신의 시야가 한없이 좁음을 늘 인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비로소 격의 없이 자신의 생각을 나눠 줄 거예요. 과학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같이 하는 거예요.
학생 : SNS 등에 글을 끄적이는 것도 도움이 될까요?
선생 : 그럼요.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글을 끄적이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논문 쓰기에도 매우 도움이 됩니다. 말과 글은 또 다르니까요. 그리고 글로 생각의 흐름을 정리하고 이후에 퇴고하는 습관을 잘 들이면 글이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학생 : 블로그나 페북 같은 수단을 잘 활용하면 좋겠네요.
선생 : 네. 이왕이면 타인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면 더 좋겠죠. 가끔씩 창의적인 생각의 조각을 얻을 기회가 생기니까요.
학생 : 그러면, 논문 초고를 다 쓰고 얼마나 퇴고해야 할까요?
선생 : 그건 답이 없어요. 대부분 무한정 퇴고할 수는 없으니 데드라인을 정해 두고 해야 하지만, 그때까지는 무한 퇴고한다는 느낌으로 토 나올 때까지 계속 고치고 또 고쳐야 합니다. 논문에는 필요한 정보를 모두 싣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이 TMI이 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너무 많은 정보는 정작 어떤 것이 중요한 정보인지를 가리는 역효과도 있어요. 그리고 문장을 가급적 간결하게, 짧게 써야 해요. 비문이나 구어체도 고쳐야 해요. 필요 없는 축약어는 없는지 봐야 하고, 중언부언이 있는지도 봐야 해요. 논문에는 가급적 감정이 실린 부사어구나 수식어구는 제외할 필요가 있고, 최대한 드라이하게 가되, 부드러운 연결을 추구한다는 느낌으로 써야 해요.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저자들은 자신의 이론과 데이터, 주장을 전달만 잘하면 된다는 느낌으로 가야 해요. 내가 굳이 계속 연구에 대한 의미 부여를 무리해서 독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어요. 물론 최대한 잘 어필할 수는 있는데, 그것 역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해요.
학생 : 감사합니다.
선생 : 잘 이해하신 것 같으니 좋은 논문 쓰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조건 많이 써 보는 연습을 거듭하는 것만이 살 길이에요. 언제든 필요하면 도움 요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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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대화록은 비단 과학기술 분야 연구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혹시 학생, 특히 동료가 될 수 있는 박사과정 학생에 대한 연구 및 논문 쓰기 멘토로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가감 없이 코멘트와 조언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문과 더불어, 그러한 코멘트들이 엮여서 주니어 연구자들, 학생들, 연구 꿈나무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실질적인 조언들의 집합으로 발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원생 때는 이런 조언을 해 주시는 분들이 거의 없었어요. 아쉬운 부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