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자 Jul 30. 2021

이 순간을 만나려고...

<슬기로운 평대생활> 2일째

자는 곳이 바뀌면 잠을 좀 설쳐 아침에 피로를 느끼는 편인데 개운하게 일어났다. 간밤의 깊은 어둠과 고요가 곤한 잠을 유도했을 것이다. 자는 동안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 어정쩡한 시간에 깨곤 하는데 아침까지 깨지 않았다. 눈을 뜨고서야 영롱한 새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식전 산책을 나섰다. 아침바다가 보고 싶었다. 걸어서 1분 거리도 채 되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따라 걸었다. 혼자 걷거나 뛰는 이들이 가끔 스쳐갔고, 파도를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평일 아침을 평대리에서 맞이하고 있을까.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난데없는 동질감에 휩싸였다.  

자전거를 탄 어떤 이는 걷고 있는 나를 앞지르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지나가니 비켜 달라. 조심하라’는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일 테지만, 기분 좋은 인기척이자, 인사였다. 이 사소한 사건이 ‘제주살이’를 들뜨게 했다. 


물가 작은 공원에 조그만 텐트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한 명 겨우 누울 텐트다. 옆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었다. 경남 함안 번호판을 달았다. 괜히 흘깃거리다가 30대 중후반 정도 보이는 남성과 마주쳤다. 머쓱해져 급히 인사를 했다. 오토바이 뒤에 작은 캐리어 크기의 소박한 상자가 짐의 전부였다. 버너에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해 먹고 떠날 준비 중이었다. 관음사 쪽에서 한라산을 한 번 더 오를 예정이라고 했다. “성판악에서 오르는 것보다 경치가 좋다고 해요.” 일주일 동안 야영하며 제주를 서쪽부터 크게 한 바퀴 도는 일정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 표정과 말투에서 단단함과 동시에 여백이 느껴졌다.   

한 시간쯤 걷다 돌아왔다. 계란 프라이를 얹은 토스트와 커피 한 잔이 첫 아침 끼니였다. 아, 얼마나 여유로운가.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어찌 이리 다채로운가. 이 장면을 영상에 담아 배경음악이라도 깐다면, 지치고 우울한 어떤 날들에 두고두고 틀어볼 수 있을 텐데. 보다 열 받을 라나. 제주 오기 전날, 집주인은 안내 문자에 “새소리에 늦잠 자기 어려울 것”이라는 낭만적인 멘트를 문자에 담아 보냈었다. 가장 한가하고 여유로운 사람이라면 이 순간에 새는 몇 종류일까를 세어 볼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세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지만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달콤한 고요가 있나, 하고 있는데 나의 휴가를 알 리 없는 다른 부서 선배의 전화가 걸려왔다. 독도 취재를 가는데 사진 마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휴가 중이니 이만 끊을게요”라고 할 순 없었다. 선배는 기사와 사진 전송에 문제가 있을 경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름 폼 잡던 분위기에 찬물 한 바가지가 끼얹어졌다. 뾰족한 해결책을 드린 것도 아니었다. “큰 문제없이 잘 될 겁니다”가 긴 통화의 결론이었다. 이후 짠 것처럼 여기저기서 “카톡 카톡” 문자가 울어댄다. 

뒤뜰로 난 문을 열어놓았더니 커튼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바람 앞에 서 보았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었다. 6월 바람은 이런 거야, 하며 감겨왔다. 멜론에선 '방랑자'를 부르는 성시경의 목소리가 감겨왔다.  


‘오늘 뭐하지?’ 당장 해야 할 무엇이 없다는 것이 참 좋았다. 한껏 게으름 피우다가 집을 나섰다. 다시 바닷가로 나가 남쪽으로 향했다. 어디까지 가겠다는 목표 없이 그냥 걸었다. 평대 바다의 파도는 이날 바람만큼 차분했다. 물 위에는 주황색 부표 같은 것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해녀가 물질할 때 띄워놓는 ‘테왁’이었다. 해녀들의 자맥질이 한창이었다. 물 밖으로 고개를 잠시 내미는가 싶더니 곧 머리부터 수면 아래로 내리꽂았다. 오리발이 물 밖으로 짧게 솟구쳐 멈췄다가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푸른 수면 위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오리발에 끌렸다. 유명한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더 큰 첨벙> 말이다. 호크니가 지금 제주에 있다면 더 멋진 첨벙 시리즈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염없이 해녀들의 작업을 바라보았다. 자연이 허락해야만 가능한 숭고하고 애잔한 노동이었다. 해녀들의 바다는 내가 보고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바위에 걸터앉아 눈앞의 장면을 낯설고 생소하게 ‘바라보는 것’이 내 휴가에서 주요한 일이 될 것 같았다.   


오늘 하루는 ‘걸었고, 찍었다’로 요약이 됐다. 사실 ‘찍는다는 것’에 대해 내 안에서 갈등이 없지 않았다. 되도록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렇다면 제일 먼저 포기해야 할 것이 카메라였다. 일하며 드는 카메라를 놓는다면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여행 가방을 싸며 조그만 똑딱이 카메라를 백팩에 넣고 말았다. ‘내가 바라본 것에 대한 최소한의 기록은 있어야 하지 않나’하는 설득으로.  


민박집 창밖으로 하늘이 붉어졌다. 해 질 녘 바다가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종일 날씨가 흐려있어서 별 기대하지 않았던 하늘이다. 하늘을 살피며 바닷가로 향했다. 시야를 가릴 것이 없어 그런지 하늘이 더없이 넓어 보였다. 서쪽에 걸린 마지막 석양이 어둠에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저물녘 하늘에 길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서울에서 석양을 볼 때면 ‘사진 거리가 될까’ 하며 일과 연결시키기 일쑤였다. 또 하늘에 시선을 오래 두고 있을 시간도 그럴만한 공간도 없었다. 이런 경험도 결국 마음에 공간이 생겨야 할 수 있는 것이리라. 시간이 많아진 이곳에서 시선을 지긋이 오래 둘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갔으면 하고 바랐다.   


해거름의 바닷가에서 낮은 한숨을 자주 뱉었다. 정말 좋은 풍광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한숨이다. “하아~, 참 좋구나.” 이런 장면에 행복이 있었던 거였다. 똑딱이 카메라와 휴대폰을 번갈아들며 장면을 채집하는 게 마냥 신났다. 

모래사장으로 가만가만히 파도가 밀려왔다. 어둠이 내린 물 위에 하루의 마지막 빛이 간신히 어른거렸고, 그 와중에 파도의 포말이 하얗게 또렷했다. “아~~” 탄성 같은 한숨이 길게 터졌다. 전율과 같은 것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 장면이 왜 내 안으로 훅 들어왔던 걸까. ‘파도에 떨어지는 마지막 빛과 포말.’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짜릿했다. 지금 이 순간이 나를 크게 위로하고 있었다. 눈을 떼지 못했다. /yaja


이전 01화 나와 좀 더 친해져 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