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평대생활> 1일째
한 달 살기로 예약한 독채 민박집이 있는 동네는 제주 구좌읍 평대리다. 차량 렌트는 하지 않기로 했다. 차가 있으면 매일 관광지라도 돌아다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처럼 살리라. 공항에서 내려 101번 급행버스를 타고 월정리에서 201번 버스를 갈아탔다. 평대초등학교 앞 정류장에 내렸다.
애플리케이션에 민박집 주소를 넣고 찾아가는 길은 단정하고 깨끗했다. 평일 오후의 마을은 평온했다. 잘 닦인 길 옆으로 제주식 단층집과 딸린 밭이 번갈아가며 이어졌다. 정갈하게 다시 손 본 집들도 눈에 들어왔다. 내가 머물 집은 안채와 바깥채 그리고 마당으로 아담하게 구성된 집이었다. 도착했을 때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짐을 풀기도 전에 민박집 지붕 위에 드리운 하늘을 보자, 마음이 느슨하고 편안해지는 듯했다. ‘잘 왔구나.’
민박집은 새로 꾸민 집이다. 옛집의 목재 골조를 버리지 않고 활용해 내부를 꾸몄다. 돌을 집 안의 벽재로 덧붙여 돌담 분위기를 잘 살렸다. 거친 비바람에 혹시 바깥출입을 못하고 긴긴 시간을 안에서 머물러도 ‘여긴 제주’라는 걸 느끼게 될 것이라는 시공업자의 마음을 읽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집 계약을 할 때 통화했던 부석희 씨였다. 앞서 도착했다고 문자를 남겼었다. 그는 당근과 깻잎 농사를 짓는 평대리 농부이며 집주인의 친척이다. 부 씨와 나의 연결은 이렇다. 서울에서 북카페 겸 채식 식당을 운영하는 나의 지인이 부 씨의 유기농 당근과 깻잎을 받아쓴다. 그런 인연으로 일면식 없는 부 씨와 연락을 했고, 부 씨의 친척인 집주인과 연결이 됐던 것이다. 주인이 테이블 한쪽에 친절하게 써 둔 민박집 사용설명서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석희 삼촌’한테 도움을 청하라”라고 돼 있기도 했다.
부석희 씨는 처음 왔으니 저녁은 자기랑 먹어야 한다며 오겠단다. 서울에 있을 때 그와 두세 차례 통화를 했었다. 제주 사투리를 섞어가며 주기적으로 터지는 호탕한 웃음에 덩달아 웃곤 했다. 유쾌한 분이라는 건 틀림이 없었다. 궁금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데 밖에 트럭 엔진 소리가 났다.
정말 새까맸다. 밀다시피 한 짧은 머리에 인상이 강렬했다. 한 문장의 말을 한 뒤 추임새처럼 한 번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전화상의 그 웃음이었다. 탄 얼굴에 새하얀 이가 유난히 돋보였다. “요즘 돌담 쌓기에 빠져 있어요.” 그는 돌담을 쌓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돌 먼지가 옷에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부 씨는 자기가 먹어본 것 중 제일이라는 흑돼지 김치찌개 집으로 안내했다. 밥을 먹는 동안 그는 자기가 했던 일에 대해 브리핑하듯 얘기를 이었다. 나는 제주에 오게 된 계기와 집에 들게 된 인연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각자의 일에 대해서도 간략이 서로 묻고 답했다. 초면에 서로 ‘TMI’을 방출했다. 그가 평대리에서 의미 있는 일을 꽤 해온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식당 주인부터 마트 직원, 지나는 이들이 그를 알아봤다. 그때마다 부석희 씨의 존재감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마트에서 물과 라면을 사서 그의 트럭을 얻어 탔다. 그가 “혹시...”하며 내 나이를 조심스레 물었다. 답했더니 “아 다행이다. 내가 쪼금 더 많네요”하고 안심하는 표정이다. 좀 편하게 대해도 되겠구나 하는. 그가 사람과 관계의 맺는 방식이었다.
“평대는 우연히 들렀다가 좋아서 머무는 이들이 많아요.” 지나는 차 한 대 없는 어둑한 2차선 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 씨의 ‘평대 부심’이 이어졌다. “이곳 사람들은 가난해도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투기와 개발의 광풍을 크게 미치지 않은 드문 마을이라는 것이다. 도로 주변 어둑함 속에 드러나는 풍광이 그의 말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처럼 스쳐갔다. 한적하고 깨끗해 살기 좋은 마을이며, 여전히 ‘제주다움’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한 달의 첫날 첫 밤이다. 거슬리는 소리 하나 없는 정적이 흘렀다. 견디다 못해 멜론 앱의 음악을 열었다. 제주 에일맥주 한 깡통을 땄다. 유한히 큰 소리가 났다. 낯선 집에 낯설게 홀로 앉아 있으니, 상념에 쉽게 빠져들었다.
“강윤중과 좀 더 친해지는 시간이 되길.” 문득 전날 친구가 보내준 문자를 곱씹었다. 지난 나의 시간들 중에 상당 부분이 나 자신과의 불화의 시간이었다는 생각에 닿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대로의 나를 격려하고 칭찬하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이 근사하면서도 짠한 말을 틈틈이 새겨야겠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