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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자 Aug 10. 2021

두 문장이면 충분했던 하루

<슬기로운 평대생활> 5일째

‘오늘 무슨 요일이더라?’ 

요일이 가물거렸다. 평일과 주말과 공휴일의 구분이 딱히 필요 없는 생활이라니 그저 뿌듯하기만 하다. 나는 대체로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굳이 따졌더니 토요일이었다.   


‘오늘 뭐할까?’라는 느긋한 질문이 참 마음에 들었다. 

민박 사용설명서는 인근 세화리에서 열리는 오일장에 가볼 만하다고 추천하고 있었다. 한적한 동네에 며칠 지냈다고 사람이 모이는 장날이 ‘볼거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벌써 사람이 그리워진 건가, 북적거림이 그리워진 건가. 

세화 5일장으로 향하는 해안도로는 한산했다. 장터가 보이자 길게 줄지은 차량행렬이 보였다. 인근에서 먹고 자는 여행자들이 대부분 이곳에 모인 듯했다. 밀리듯 걸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많았다. 띄엄띄엄 사람을 보다가, 한데 모인 것을 보니 많아 보이는 착시 같은 게 생긴 듯했다. 그새 많고 적음에 대한 셈의 기준이 달라졌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이 환경에 지배받는 종임은 틀림없고 셈의 기준이 달라질 가능성은 농후하다고 결론지었다.    

생선, 과일, 반찬, 공예품, 옷, 분식 등이 즐비한 장터를 종으로 횡으로 걷다가, 뭐라도 사자 싶어 젓갈 가게 앞에 섰다. 요 며칠 매일 한 끼는 끓여먹고 있는 누룽지 생각이 났다. 젓갈을 얹어 먹는 누룽지를 상상하자, 입에 침이 미친 듯이 돌았다. 낙지젓, 창란젓, 멸치볶음을 5000원어치씩 구입했다. 상인이 비닐장갑 낀 손으로 한 움큼 집어주는 양의 가치가 5000원이라는 건 어떤 기준일까. 낙지와 창란과 멸치의 가치는 여러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상인 한 움큼으로 동등해졌다. 전국 오일장을 숱하게 가봤지만 장을 본 건 생애 처음이었다. 

“호떡 하나 700원이요.” 값을 묻자, 호떡을 뒤집으며 그 말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이 결혼이주여성이 답했다. 옆에 시어머니로 보이는 어르신이 있어 그렇게 짐작했다. 베트남에서 왔을까. 제주로 오게 된 사연을 궁금해하며 호떡을 오물거렸다. 시끌시끌한 장터를 뭔가를 사야겠다는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는 나 같은 이들이 많아 보였다.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는 형국이었다. 


장터를 벗어나자, 사진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구좌사진관’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었다. 사진이 업이다 보니 사진관 앞에서는 자동으로 걸음이 멈춘다. 입구 유리문 손잡이에는 “오늘 사진 못 찍어요”라고 써져 있었다. 손차양을 만들어 안을 들여다봤다. 작지 않은 건물의 전 층을 스튜디오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큰 사진관을 열어 돈이 벌릴까. 붐비는 장날에 문을 닫은 것을 보니, 장날 보고 운영하는 사진관은 아니겠고. 제주가 코로나 이후 쏠림이 심한 여행지가 되었으니, 신혼부부와 가족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야무지게 벌이를 할 수도 있겠지 싶었다.     

“오늘 사진 못 찍어요.” 집으로 가며 문장이 되뇌었다. 입 안에서 발음을 굴려보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늘 쉽니다’ ‘외근 중’ ‘휴가 중’ 같은 건조하지만 흔한 표현을 마다하고 써 붙인 저 문장에는 의도했든 안 했든 촉촉한 여운이 남는 것 같았다. 굵직한 붓질의 손 글씨로 남긴 사진사(포토그래퍼보다 정감 있는 단어다)의 마음이 읽혀서다. 사진사의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사진관을 찾은 고객을 향해 양해를 구하는 마음까지 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기야 어딘가에서 제주를 배경으로 셔터를 누르고 있을 이 사진사를 응원하게 됐다.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진기자로 어느 순간에는 이런 말을 정중하게 한 번쯤 내뱉고 싶어 졌다. “오늘 사진 안 찍습니다.”  


저녁에 오늘 하루를 복기하다가, ‘나는 오늘 사람을 만나 몇 마디를 했나’ 곰곰이 따져봤다. 오일장에서 “젓갈 어떻게 해요?”와 “(호떡을 가리키며) 이거 얼마예요?”가 전부였다. 이 두 문장이면 충분했던 하루였다. 말이 아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입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은 말은 생각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나와 내 주위는 너무 많은 말들로 채워져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비난과 적의의 말들, 시기와 질투와 무시와 편견과 오만의 말들, 거짓과 위선의 말들, 그저 말을 위한 말들…. 

당장은 반성과 후회의 마음이었지만, 다시 익숙했던 생활과 사람들 속으로 돌아간다면 ‘너무 많은 말’을 금세 회복하겠지 싶어 서글퍼지고 말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두 문장이면 족했던 제주의 어느 하루를 기억해낸다면…. 뭐 그것으로 얼마라도 위안 삼을 수 있지 않을까.  /y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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