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평대생활> 6일째
딱히 휴일과 평일이 따로 없고, 구분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휴일이면 몸이 먼저 알고 퍼져버리곤 했는데 그런 낌새도 없다.
오늘은 좀 멀리까지 가보기로 했다. 안 걷고는 못 배길 만큼 쾌청했다. 평대를 출발해 해안을 따라 아래쪽으로 걸을 만큼 걸어보자고 마음먹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며 이어지는 길에서 발걸음은 가벼웠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빛과 색을 띠는 바다가 나란히 따라 걸었다. 물은 투명했고 파도는 잔잔했다. 언제 비가 올지 모르는 제주니 맑은 날이면 일단 부지런히 걷자는 생각이지만, 뭐 비가 오면 비의 정취에 또 걷겠지.
“휘~요~” “휘~이~~” 해녀들이 숨비소리가 바람에 실려 귓전에 달려들었다. 단지 가쁜 숨을 수면 위에서 뱉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 여기 있어~’ 명줄을 쥔 무섭고 두려운 바다에서 서로의 안전의 확인하고 묻는 신호가 아닐까. 또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안전함에 안도하고 물 덕에 지속될 수 있는 삶에 대한 감사의 노래로 들렸다. 물질엔 주 5일도, 휴일도 없어 보였다. 물때와 그날 물의 성질이 해녀들에겐 조업 달력인 것 같다.
바다 위에 떠 점점이 흩어져 있는 주황색 테왁과 휘파람 소리가 내 걸음걸음을 응원하는 것 같아 다리에 힘이 실리는 기분이었다. 색 고운 바다와 숨소리를 배경 삼아 걸어갔다. 눈과 귀가 즐겁다. 거대한 질서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동시에 내가 거대한 질서 속에 아주 작은 점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제주에서 돌고래를 만난다면’은 걷다가 만난 펜션 이름이었다. ‘하.바.나’는 카페였다. ‘하늘과 바다와 나’라는 말이었다. 길 따라 늘어선 펜션과 카페를 보며 만만치 않았을 작명의 노고를 짐작했다. 짧은 글에 붙는 제목 하나 다는 것도 에너지 소모가 큰데, 돈 많이 들인 사업체에 붙일 이름이라면 더 말해 뭐하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바닷가에 들어선 가게들은 ‘상호’로 소리 없는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로 오시라’는 상호의 아우성이었다.
걸으면서 ‘내가 돌고래를 만난다면…’하고 가정을 끌어들였다. 별 것 아닌 것이 조금 특별해지기도 하는 순간을 걷는 동안에 가끔 만난다. 걷기의 매력이다. 가정에 대한 나의 즉흥적인 답은 “너 제돌이니?”였다. 훅 던져놓고 혼자 깔깔거린다.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는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쇼를 하다가, 2013년 고향인 제주 성산 앞바다로 돌아갔다. 야생 방류 얘기가 한창 나오던 때 서울대공원에서 쇼를 하던 제돌이를 카메라에 담은 적이 있었다. 가끔 제주 뉴스에 “제돌이와 친구들은 바다에 잘 적응하며 살고 있다”는 소식을 볼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세화를 지나 하도까지 걸었다. 저만치 성산일출봉이 보였으나 걸어서 돌아올 길을 가늠하고 돌아섰다. 하도리 해수욕장을 반환지점으로 삼았다. 올레 21코스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안과 마을길을 번갈아 걸었다. 마을 안으로 난 올레에는 밭길이 꽤 길게 이어졌다. 이 좋은 길을 걷어 다시 해안으로 나오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걷는 동안 몸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걷는 것이 운동인지, 노동인지는 몰라도 몸의 감각에 이렇게 예민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발가락 쪽이 조금 쓰라렸고, 장딴지가 뭉쳤고, 몸이 곧 무거워져 쳐졌다. 발가락 끝에 살짝 물집이 잡힌 것부터 시작된 사소한 징후들이 몸을 지배하고 말았다. 더위를 좀 먹은 것 같고, 머리가 어질 했고, 팔다리가 붉어져 따끔거렸다.
몸에 온 신경이 쏠리자, 잡다한 생각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작은 질문과 사유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몸과 마음도 간결하고 단순해진 느낌이었다. 시원한 물에 빨리 씻고, 드러누워 쉬고 싶다는 몸의 욕구만 남았다. 모든 것이 몸의 감각 아래로 숨어버린 듯했다. 내 안에서 혼란스럽게 작용하던 것들이 적어도 걷는 순간만큼은 시시해지고 말았다. 정신이 맑게 정화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허기에도 솔직해졌다. 배가 많이 고팠다. 가장 먼저 보이는 칼국수집에 뛰어 들어갔다. 평소 먹는 것 앞에서 허둥대는 걸 세상 못난 짓이라고 생각한다. 소문난 맛집도 줄 서서 먹는 건 질색이다. 먹기 위해 산다고도 생각하지만, ‘오로지’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아 보이는 건 또 싫은 것이다. 주문한 해물칼국수가 나왔고, 난 고개를 그릇에 거의 파묻고 먹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면과 국물을 들이마셨다. 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쯤에야 ‘복스럽게’가 아닌 ‘게걸스럽게’ 먹는 스스로를 깨닫고는 뻘쭘해졌다. 좀 더 걷다가 이번엔 더위를 못 참고 편의점으로 뛰어들었다. 달달하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급히 들이켜고,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볼과 팔에 비벼가며 아이처럼 쪽쪽 빨아먹었다. 몸이 바라는 것에 좀 솔직해졌다고 해야 할까.
배우 하정우는 걷기 마니아다. 그가 낸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었다. ‘걷기 교주’라고도 불리는 하정우는 하루 3만 보, 심지어 10만 보도 걷는다. 강남에서 일터인 홍대까지 걸어서 다니고, 비행기 타기 위해 김포공항까지 걸어간단다. 걷는 게 거의 자기 학대 수준이었다. 그가 걸으며 느낀 몸과 마음의 변화에 대한 글이 큰 울림은 없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기에 공허하게 들렸으리다. 하지만 요 며칠을 걸었다고 불쑥 하정우를 떠올렸다. 그의 걷기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걷는 동안 나를 구성하는 몸과 마음의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 같다. 일종의 변화가 아닐까.
오늘은 ‘내 몸을 낯설게 감각하게 된 날’이라고 적어두고 싶다.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