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평대생활> 3일째
새벽에 비가 내렸다. 굵기가 가늠되지 않는 비가 양철 지붕을 때렸다. 소리가 잠결에 드문드문 들렸다. 비바람에 밤잠을 좀 설쳤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가뿐했다. 출근할 일 없는 아침이란 걸 몸이 알아서일 테다. 몸의 반응이지만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개운하지 않은 마음과 다소 긴장한 상태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잘 버텼다”라고 내게 말해본다.
아침산책에 나섰다. 간밤에 요란을 떨었던 비는 부슬부슬 곱게 내렸다. 바다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이따금 비에 섞여 들었다. 아니, 바람에 비가 스몄다고 해야 하나. 제주의 바람은 늘 거기 있는 상수다. 바람이 있고, 그걸 상태에서 비가 오거나, 맑거나, 흐리거나, 눈이 오거나 하는 것이다. 살랑살랑 바람이 비를 뿌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쓰고 있던 우산이 발랑 뒤집어져 머쓱했다.
어정쩡한 점심을 평대에서 유명하다는 성게국수로 해결하기로 했다. 집주인도 추천한 ‘맛집’이었다. 할머니부터 엄마, 딸까지 3대째 해녀인 스토리가 있는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몇 개의 테이블이 전부인 작은 가게다. 성수기가 아닌데 금세 자리가 찼다. 주력 메뉴 성게국수를 시켰다. 국수 위에 성게 알이 흩뿌려져 나왔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맛이 별로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맛’이라는 것이 단지 혀로만 느끼는 1차원적인 맛이 아닌 것일까. 음식의 맛보다는 해녀 3대라는 서사가 더 맛나고 유명한 집인 걸로.
내내 비가 온다기에 종일 집에서 머물 참이었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감각하리라.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개었고 햇살이 따가웠다. 말갛게 씻긴 돌담이 반짝였다. 돌담을 배경 삼아 핀 봄꽃이 환했다. 풀과 나무가 싱그럽고 기분 좋은 냄새를 풍겼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폈다. 다시 바람이 불어왔고 구름이 몰려왔다. 다리를 뻗고 바다를 바라보고 앉았다가, 불쑥 궁금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바다를 바라보는 중년의 남성을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머릿속에 유체이탈의 그림을 그려 나의 머리 위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누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라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서글프고 쓸쓸해지는 대목이다. 타인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면서 살아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시선 앞에 둔 ‘나’였다면, 그 안에 진실한 내가 있었을까. 온전한 나였을까.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평일 오후 바닷가에 앉은 나를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답은 자명했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 이 한심한 인간아.”
밤에 잠자리에 누워 TV를 켰다. 한국인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의 예전 어록이 나왔다. “나 육십일곱 살이야. 나도 육십일곱은 처음이야. 살아본 적 없는 나이고. 실수하고 후회하며 사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나이를 먹으면서 실수와 시행착오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래 봐야 달라질 것 없지만 말이다. 우리 나이로 마흔아홉. 나 역시 처음 살아보는 나이라고 가만히 읊조려본다. 잠을 청하며 다독인다. 실수와 후회는 어느 나이에나 과정인 거라고. 다만 시시해지지는 말자고. /ya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