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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Oct 23. 2021

안나푸르나에서의 깨닮음

최상의 자리에서 출산을 결심하다.


한국에서  6년 반 일한 첫 직장을 관둘 때는 괜스레 상사에게 동료에게 죄송스럽기도 하고 헤어짐이 슬프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어쩜 주말도 없는 지방 출장에 야근으로 다져진 동료애가 끈끈했던 탓이겠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 일을 하면서 직장을 옮기는 것도 워낙 흔하고, 또 회를 거듭하면서 요령도 생겼다. 그러다가 다니던 회사 노트북은 반납해버렸지만 다음 회사 이메일 주소는 아직 모르는 첫 출근 전까지의 근심 걱정 없는 꿀 휴가의 맛을 알아버렸다.  


전 회사에서 남은 휴가을 끌대로 끌어 퇴사일을 조정하고, 또 새 회사에는 사실에 근거하되 설득이 가능한 가장 늦출 수 있는 합리적인 첫 출근일을 제시하는 짱구와 뱃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렇게 두 회사 사이에 낀  무직의 시간은 업무 걱정 없고, 취업 걱정 없는 환상의 홀리데이다. 지난번 이직 때는 인도네시아 마나도 섬에 3주간 혼자 머물면서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바닷속 세상을 발견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을 할까?


창업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로 이직할 당시, 마침 나의 커리어 협상 능력은 쭉쭉쭉 최고치를 달리고 있던지라 연봉도 30프로 점프해서 고용 계약서도 사인했겠다.  2년 가까이 사귄 남자 친구와 불타는 사랑은 아니지만 꽤 말랑말랑한 연애질 중이겠다. 37년 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은 듯한 만족감에 싸여 내가 못해낼 건 이 세상에 없다는 천상 지존, 시쳇말로 자뻑의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20대에 꿈꿨지만 아직 이루지 못했던 것 중 하나인 네팔 안나푸르나 정복이 기억났다. 20대 초반에 지리산 종주를 같이 했던 소꿉친구들과 꼭 같이 가자고 적금도 부었던, 하지만 사실 진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 내 인생 20대의 버킷 리스트.


당시 자뻑 상태의 나는 '까짓 거 지금 하자. 시간 날 때.'  마치 제주도 여행 가듯, 그렇게 네팔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 표를 사버렸다. 보통 일반인이 히말라야 장정을 할 때면 셔퍼(Shepherd)를 고용해서 짐도 나눠 들고 가이드를 받는데, 그 당시의 나는 뭘 믿고 그랬는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무작정 혼자 안나푸르나 장정을 시작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짐을 챙겨 어슴푸레 밝아지는 산길로 발걸음을 떼고서는 하루 종일 걷고 걸어서 오후 3시쯤에 다음 티하우스에 도착해서 휴식 하기를 그렇게 열 흘을 했다.


햇살 비치는 산은 그저 아름답고 상쾌했다.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햇볕 아래 누워 낮잠도 청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둠이 일단 내려앉으면 칠흑의 검은 세상은 손발을 다 꽁꽁 얼어붙도록 추웠다. 이렇게 산은 사람을 겸손케 한다. 좋은 학력도 높은 연봉도 다 소용없고, 변화무쌍한 산을 상대로 짱구를 굴릴 수도 갯기를 부릴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렇게 높은 산속에는 수행자들만 사는 줄로 착각하고, 그들을 만나 뭔가 혜안을 얻기를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그 높은 산줄기를 타고 걷다가 듬성듬성 지나게 되는 아주 작은 산속 마을을들에서 가장 많이 마주친 사람들은 수행자가 아닌,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녀오는 어린이들, 산양을 치며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는 소년들, 갓난아이를 돌보는 이가 다 빠진 할매할배들이었다.


수행자만 사는 줄 알았던 그런 깊은 산속에서 대대 손손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는 풍경을 목격하면서, 나는 갑자기 인간, 더 나아가 인류, 우리의 숙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묵묵히 인류에 대해 생각하면서 열흘을 혼자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쩜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는 대가족의 모습이 왜 그다지도 신선하게 다가왔던 걸까. 특히 높은 산지대다 보니 강한 햇볕으로 볼살이 빨갛게 익을 대로 익은 홍시 같은 얼굴을 한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와 할매할배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가슴 깊은 속에서 알 수 없는 응어리가 생기면서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나라는 존재를 현재 진행형인 20만 년 인류 역사적 관점에서 나 개인이 아닌, 인류의 연장선 상에 놓인 구성원으로 깊이 인지했던 거 같다.


최고 연봉을 달성한 내 인생 황금기인 줄 알고 떠난 그 여행이 결국 수행 길이 된 셈이다. 열흘간 걷고 걷는 동안 이 커다란 산속에서 나는 정말 작디작은 한 점일 뿐이구나 - 하는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갑자기 무너지는 흙더미에 내가 깔려 사라져도 아무도 못 찾겠구나 하는 두려움, 잘못 든 길로 트렉 대신 울창한 산속 깊이 들어가 버려 혼비백산 울면서 뛰던 순간, 갑자기 쏟아진 우박비를 맞고 걷다가 온통 하얀 눈밭에 밤을 지낼 마을을 놓치고 되돌아가야 했던 순간의 절박함,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밥을 우걱우걱 먹고는 복통에 시달리며 이렇게 죽나 보다 뜬 눈으로 지샌 밤.......... 그저 매일매일 걷고 걸어 해가 지기 전에 다음 티하우스에 도착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로구나. 그렇게 나에 대한 한계를 깨달았다. 또한 더불어서 그 산속에서 마을을 이루고 몇 백 년을 살아온 것은 나 같은 한 점의 개인이 아닌, 인류의 공통체적 힘이었겠구나 하는 또 다른 깨달음이 있었던 거 같다.


사실 난 그때까지 나의 여성으로서의 가임력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딩크족도 많은 세상에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자녀 출생은 내 인생 이정표에서 단 한 번도 고려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 진행형인 인류의 역사를 눈으로 접하고 가슴으로 느끼고 나니, 당장 내가 여성으로 가지고 태어난 가임력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인류가 존재함은 세대를 달리하여 종족 번식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나 같은 한 점 한 점의 인간이 모이고 모인 인류의 역사는 내 한 점이 사라지기 전 다른 한 점을 남겨야만 지속 가능하겠다는 뭔가 내가 인간으로서의 인류에 대한 사명감이랄까.


그렇게 인류의 지속을 위한 사명감으로 나는 임신을 결심했다. 하지만, 지금 아이 둘을 건사하며 하루하루 지지고 볶다 보면 솔직히 그런 가임력의 위대함 보다, 남녀의 타고난 불공평함 내지는 여자의 숙명적인 비애 정도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어쩜 이럴 수 있지. 내가 안나푸르나에서 깨달은 여성의 가임력에 대한 위대함과 인류 존속의 핵심에 대한 경외감, 그러나 반대로 직접 임신 출산 육아를 겪는 내가 당장에 느끼는 이러한 울분과 비애의 감정은 너무나 큰 모순이 아닌가. 그럼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맞춰진 걸까. 뭔가 인류의 퍼즐을 다시 제자리로 잘 맞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이 든 것 같다. 특히 40줄에 다달아서야 임신 출산을 경험한 나에게는 앞으로 주요 출산층이 될 젠 밀레니얼 세대들에게 여성의 가임력이 나의 성공과 행복의 걸림돌이 되기보다, 오히려 성공과 행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그건 개개인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회적인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일이니깐.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사명감이 무모한 창업에의 도전으로 이어졌고, 돈을 잘 벌지 못하고 이 길이 맞는 걸까하는 혼란 속에서도 벌써 2년씩이나 존버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라는 오랜 속담이 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단다. 아이는 가임력을 가진 여성이 임산과 출산 후에도 도맡아 키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 여성들에게 육아가 떠밀어졌던 걸까. 어린이들이 뛰는 소리에 위 아랫집 간의 민원이 빈번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이르는 그런 개인주의 사회에서 마을 단위의 공통체적인 서포트는 사실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면 안나푸르나 깊은 산속의 마을들이 고립될 수밖에 없는 그 지형적인 제한성으로 인해,  이상적인 공통체적 육아를 지속 가능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지금은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업무 걱정, 취업 걱정 없는 꿀맛 휴가는 꿈꿀 수도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잠깐 집 앞 놀이터에 나간 사이 초집중해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하루의 한 시간이 꿀맛보다 더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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