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제이 Oct 01. 2021

Procrastinate

미루기 대장에게 필요한 건

Procrastinate /prə(ʊ)ˈkrastɪneɪt/

: delay or postpone action; put off doing something.


나는 종종 (실은 매우 자주)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I’ve been procrastinating.”

"아브 빈 프러-크러스티-네이링"

높낮이 굴곡이 많은 영어 단어라서 한국사람이 발음하려면 노래라도 부르듯 해야 하는데, 난 그 어감이 참 좋다. 뜻을 모르고 들으면 내가 뭐 대단한 걸 한다고 들릴 것도 같다. 그래 봤자 할 일 안 하고 미룬다는 말인데.


하지만 나는 위 문장의 진의와 가장 가까울 한국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넌 왜 맨날 딴청만 피우고 미루기만 하니.”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 아빠에게 귀에 박히게 들어서 생긴 반감일까.


나는 그냥  미루기 대장이다. 인생을 그렇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서 살아온지도 마흔 줄. 중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 때도 벼락치기의 고수였고,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초반에 너무 힘들어서 매일 관둬야지 하면서도 사직서 쓰길 미루고 미루다 결국 그 회사를 7년 다녔다. 임신, 출산도 미루고 미루다 마흔 줄에 했고, 어젯밤 미루고 미루다 그냥 못 치우고 잠들어버린 부엌 바닥에 떨어진 사과 한 조각은 간밤에 개미떼의 습격을 받아, 오늘은 아침부터 콤뱃 스프레이를 들고 쉭쉭쉭 개미와의  전쟁을 한바탕 벌였다.


강산도 바뀐다는 12년 전, 나는 그 7년의 첫 직장 생활을 마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MBA 지원 과정 중에 하나가 MBA를 마친 후 어떤 커리어 플랜을 가지고 있는지 쓰는 에세이가 있었다. 당시에 나는 회사의 쳇바퀴 도는 생활에 지쳐있었고, 뭔가 새로운 걸 하고 싶었지만 그게 뭔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난 취업 말고 딴 거라서 창업을 하겠다 했다. 나름 근사한 비즈니스 아이디어도 있어서 꽤 그럴듯하게 유창하게 적었던 거 같다. 이 창업에 대한 계획은 마음 한편에 계속 남아 있었지만, 결국 미루기 대장인 나는  MBA 졸업 후에도 회사를 세 번씩 바꿔가면서 회사원을 8년이나 더 했다.


이렇게 오늘 일을 내일을 미루거나, 막연히 마음에 품은 꿈을 실행에 옮기기를 미루고 미루며 계속 꿈만 꾸기를 반복하던 3년 전 (억울하게 회사를 나온 이후 전업맘이 된 시점), 뭔가 나 혼자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매일매일 궁리(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실행은 미루기 대장답게 6개월쯤을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진도 못나가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즈음에 첫째를 반나절 어린이집에 드롭하고 알코올 냄새가 가득한 네일숍에 앉아서 페디큐어를 받으면서, Upwork라는 프리랜서 사이트를 통해 일러스트레이터를 찾고 있었다. 아이랑 둘이 들쑤시고 다닌 싱가포르의 방방곡곡을 ABC 알파벳 그림책으로 만들어서 싱가포르에 놀러오는 친구들한테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의 매우 개인적인 프로젝트였다. 그 때, 카톡 카톡 메시지가 들어왔다.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홍보녀 친구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서로에게 안부 문자를 주고받던 그날, 우슷개소리로 우리 한 번 해볼까, 할 수 있을까 했던 그 순간들에는 우리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업 동반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나의 창업 도전의 기나긴 Procrastination에 맞춤 표를 찍을 수 있던 건, 바로 함께 걸어가는 그녀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우리는 2년 전 따끈따끈하게 법인 설립을 하고 회사 이름과 로고를 오목 두듯 긁젂이던 서울 여의도 Wework에서의 한 달 이후, 서로를 볼 수가 없었다. 코비드로 인한 보더 컨트롤 상황으로 문자, 이메일, 화상 미팅으로 백 프로 비대면 비즈니스 중이다. 나는 싱가포르에서 그녀는 서울에서 여전히 각자의 할 일들을 뚝딱뚝딱해나가고 있다. 


오늘도 빼곡한 To-do 리스트를 쳐다보며 내 아침은 다 어디로 갔지……의아하다. 애데렐라의 시계는 똑딱똑딱 빨리도 흐르고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한 시간. 어떻게든 다 끝내보겠다고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고 굴린다. 내 두뇌는 5분 간격으로 업무를 분류하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업무를 가까스로 해치웠다. 휴우. 아이의 픽업 시간은 그 어떤 데드라인보다 강렬하고 효과적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그 배짱,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는 그 집요함.


어쩌면 미루기 대장 나에게 필요한 건, 애데렐라의 긴박한 데드라인(픽업타임), 그리고 서로 채찍질하고 소담 소담할 수 있는 같이 걸어갈 파트너가 아닌 가 생각한다. 오늘도 여전히 미루기가 한창이지만, 나는 그 미루기의 엄청한 가능성을 믿는다. 'I've been procrastinating' 쏘 왓?

이전 07화 그저 피하는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