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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제이 Sep 29. 2020

일화. 아침 외출

 그녀는 오랜만에 오차드로 간다.

오늘 아침도 밤새 젖이 흘러 가슴팍에 국그룻을 뒤집어 쓴 듯한 티셔츠를 입은 채로  헐레벌떡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간다. 왼 팔에는 방금 젖 우유를 마시고 트림을 채 하지 못해 낑낑대는 네 달 배기 둘째가 안겨있고, 오른손에는 실험실에서 쓰는 눈금이 촘촘히 새겨진 비커 같이 생긴 우유병과 펌핑 컵, 그리고 초록색의 가느다란 튜브가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에 어렵사리 끼워져 있다.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무슨 실험이라도 한 걸까.


그녀는 아침 일찍 물 한 컵 들이킬 새 없이, 둘째에게 젖을 물린 터라 목이 꽤나 말랐다. 그런데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커피 캡슐에 먼저 손이 가는 것을 보니, 어젯밤도 그다지 좋은 잠자리는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커피머신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퀭한 눈을 들어 "좋은 아침? 잘 잤어? " 하고 인사를 한다. 어젯 저녁 먹고 미처 못 씻은 더러운 그릇들 사이에서 시리얼을 먹고 있는 첫째과 그 옆에서 어린이집 스낵박스를 싸는 신랑을 보면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자니 짠하기도 하고 또 꽤나 행복하기도 했다.


오늘은 네 달 배기 둘째를 신랑에게 맡기고 나가려고 한다. 기저귀, 먹일 분량만큼 분리해서 담는 분유통, 알맞은 온도로 보온병에 채운 물, 여분 옷, 쪽쪽이 등등 챙길 것이 열개도 더 되는 영아와 동행하지 않는 외출 준비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다니 정말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본다. 그리고 거울에서 나를 보고 있는 그 여자에게 나는 뭔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옷장 저 밑에 깔려 있던 에르메스 스카프를 찾아내 거울 속의 그녀 목에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뭔가 어색하다. 30도 넘는 싱가포르 날씨에 집을 나서 5분만 걸으면 땀으로 범벅이 될 테지만, 그래도 뭔가 좋은 걸 둘러줘야 할 것 같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에르메스 스카프는 결국 가방에 쑤셔 넣고 집을 나선다. 그녀는 난생처음 심리 치료라는 것을 받으러 간다. 지하철을 타고 심리 치료 클리닉이 있는 오차드로 가는 길,  마치 면접을 보러 가는 마냥 머릿속으로 예상 질문 리스트와 모범 답안을 만들고 있는 자신이 좀 웃겨서 혼자 피식 웃기도 한다.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조금 들떠 있었다. 오차드 역에 내려서  명품 샾이 즐비 간 스콧 로드를 걸어가면서 슬그머니 가방에 손을 넣어 에르메스 스카프를 꺼내 목에 둘렀다.


심리 치료 클리닉에 도착하자 여러 장의 문서에 네/아니오로 답변을 하거나 혹은 내 사인을 해서 동의를 해야 했다. 오는 내내 들떠있는 마음이 채 가라앉지 않은 채로 문서 작성을 하다 보니 내가 과연 심리 치료가 필요한 걸까 싶었다. 그리고 대기실을 둘러보니 나처럼 너무나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너무 슬퍼 보이거나 미쳐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면접 대기실에 와 있는 것 같다. 각자 한두 개의 의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자신만의 생각에 집중한 다른 면접 대기자들을 둘러보면서 갑자기 긴장이 된 그녀는 믹스 커피를 타 와서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검은색 롱스커트에 민트색 셔츠 그리고 회색 카디건을 걸친 심리 치료사 미스 Ooi가  그녀 이름을 불렀고,  둘은 형식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방에 들어섰다. 그 방은 마치 예전 직장의 작은 미팅룸처럼 생겼다. 컴퓨터가 놓인 데스크와 등선에 맞게 오래 앉아도 피로하지 않은 고급 의자가 한 벽면에, 또 다른 벽면에는 등받이가 있는 회색의 벤치 스타일의 카우치에 민트색의 쿠션이 몇 개 올려져 있었다. 여전히 홀짝홀짝 남은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치료사와 마주 보고 앉은 그녀는 문득 다시 직장인이 된 것 같았다. 뭔가 공백을 채우려고 떠드는 직장인의 대화. 굳이 본질에 닿지 않고 혹은 닿지 않기 위해서, 어느 지점에서 절충하는 그런 형식의 대화를 하게 될 것 같아서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어디까지 까야할까. 내 롤러코스터 감정선을 어디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끄집어내서 설명해야 할까.


최근 나는 몇 번의 에피소드를 겼었다. 갑자기 너무 화가 나서 벽을 보고 괴성을 지르거나, 갑자기 너무 슬퍼서 대성통곡을 한다. 보통은 저녁 시간에 일어난다. 첫 번째 괴성은 둘째 목욕을 시키고 재우기 전 젖을 물리고 앉아있을 때였다. 번잡한 하루가 지나고 찾아온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 머릿속은 오만 잡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어느 한순간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민다. 그리고 나는 미친년처럼 괴성을 지른다. 둘째는 너무 놀라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하고, 잘 채비를 하던 첫째와 아빠도 놀라 방으로 올라온다. 나는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른다. 이번에는 첫째도 놀라 아빠 바지자락을 잡고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다. 나는 최악의 수치감과 부끄러움에 몸을 떤다.   


치료사는 첫 에피소드의 시점과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기억한다. 둘째가 100일 잔치를 하고 난 이후 시작됐다. 아이러니하다. 출산과 신생아를 돌보는 가장 힘든 시기를 견뎠고 상황은 보통 100일이 지나면 더 나아진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시점에 이런 에피소드가 시작됐을까? 심리 치료에 오기 전부터 원인 분석을 되씹어하던 그녀는 이미 나름의 스토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서없이 그냥 떠들기 시작했다. 첫째를 낳고 뜻하지 않게 겪은 산후우울증으로 갔다가, 둘째가 태어나고 이 주 되었을 때 뇌척수액 감염으로 병원에 있던 한 달로 갔다가, 첫째 출산휴가 마치고 회사에 복직한 시점으로 돌아갔다가, 결혼 결심을 하게 된 네팔 하이킹 여행 얘기로 갔다가, 신랑 가족 흉보기로 갔다가, 신랑이 좋은 아빠라는 칭찬으로 갔다가 오락가락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치료사는 내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분석하는 냥,  종이에 빠르게 메모를 해갔다. 좌측 상단에 쓰다가 우측 하단에 쓰다가 다시 좌측 중간에 쓰다가 내 50분의 푸념을 따르게 세그먼트 하듯 그녀의 손은 빠르게 종이 위를 나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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