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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티제 Oct 24. 2021

엄마는 남자친구 없었어?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거야?

“엄마는 아빠 말고 남자친구 없었어?”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내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갑자기 수도꼭지를 높이 들고 수압을 높였다. 마치 내 목소리가 물에 쓸려 하수구로 내려가 버리길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어림없다. 나는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엄마! 엄마는 아빠 말고 남자친구 없었냐고. 어?”


 엄마는 접시를 달그락거렸다. 바쁜 데 쓸데없는 소리 한다, 우리 때 연애 뭐 그런 거 제대로 하는 사람 없었다는 소리는 덤이었다. 이런 반응, 충분히 예상했다. 우리 가족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터놓는 편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예전부터 우리 집에서는 이성 교제, 여성, 남성, 뭐 그 비슷한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쉬쉬했다. 오죽하면 내가 생리를 시작하고 2년 가까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을까.


 이 불편한 와중에 용기 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답답해서였다. 정말 너무 답답해서.

 엄마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을 당시, 엄마와 대화하는 것이 사이다 없이 연달아 고구마만 먹는 것처럼 퍽퍽했다. 대화만 시작하면 첨예한 의견 대립과 감정적인 불공감에 빠졌다. 어쩜 한 가족인데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싶었다. 지금부터는 그때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꽤 오래 사귀던 연상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책임감도 강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데다가, 똑똑하고, 돈도 잘 버는 남자친구. 얼굴도 하얗고 잘생긴, 배우자로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오래 사귀기도 했고, 서로 안정적인 직장에 수입도 꽤 좋은 편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결혼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 부모님에게도 참 잘했다. 부모님은 그런 예비 사위를 좋아했다. 결혼 준비가 진행될수록 가족끼리 교류도 많아졌다. 그래서 난 바보처럼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게 가족이 되는 과정이구나’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 난 당연히 결혼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부모님은 슬슬 주변 지인들에게 딸의 혼사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이 꽤 행복해 보였다. 당신들의 과업 가운데 하나를 끝마친 것 같은 홀가분함도 엿보였다. 자식이 결혼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기뻐하다니! 한 것도 없이 절로 효녀가 된 기분도 들었다.


 이 모든 일의 끝이 내가 어릴 적 수없이 읽었던 동화 속 공주들 이야기처럼 ‘그렇게 그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전 남자친구와 결혼 준비하는 가운데 마찰이 잦았다. 결혼을 한 번이라도 준비해 본 사람이라면 어떤 마찰인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의견은 의견대로 안 맞고, 바쁘다 보니 예민해지고,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세상 살면서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갈등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잘난 예비 신랑의 또 다른 여자친구였다. 여자 사람 친구가 아니라 정말 여자친구. 그녀와 통화를 한 뒤 몇 차례 사실 검증을 거친 결과 그가 꽤 오랜 기간, 나 아닌 다른 여자‘들’을 만나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 집 예비 사위는 나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있었다. 정말 잘못했다나, 결혼 전에 한 번 놀고 싶었다나 뭐라나?


 그의 바람은 사실 자체로 충격이었다. 하지만 난 그 상황 자체보다 상황이 만들어 낼 또 다른 일들이 염려됐다. 집안 장녀가 결혼한다고 부모님께서 얼마나 기뻐했던가! 잘난 예비 사위를 얼마나 아끼며 좋아했던가! 심지어 부모님은 거의 모든 지인들에게 내 결혼 소식을 알린 상태인데,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차라리 둘이 사귀고 있을 때 이런 일이 터졌으면 조용히 정리하고 끝낼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는 가족이 있고, 가족의 지인들이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상황이 복잡했다. 집 계약을 마친 상태였고, 새로운 가구, 전자제품, 각종 집기류가 이미 자리 잡았다. 모바일 청첩장이 나왔고 많은 이들에게 청첩장을 보냈으며, 축하까지 받았다. 젠장. 아주 잠깐, 그냥 결혼식을 강행할까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결혼이 취소됐다고 일일이 알리느니 그냥 눈 질끈 감고 결혼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살날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데 내 인생을 그렇게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알렸다. 예비 사위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도 상처지만 예비 사위를 이미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던 부모님에게도 너무 큰 상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자식 걱정에 밤잠 이루지 못하실 것도 눈에 선했다. 게다가 이유 불문 내 결정을 지지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자식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앞두고 어떠한 선택을 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무조건 지지해 줄 거라는 믿음.


 하지만 부모님은 생각만큼 나를 지지해 주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무르려면 당신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을 단번에 납득시킬 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예비 사위가 바람피웠다는 얘기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연예인들이 흔히 말하는 이별 사유인 ‘성격 차이’를 예로 들며 결혼하기 어렵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빠는 그럭저럭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엄마는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병이 나고 몸져누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비슷한 상황에 시달리게 됐다. 엄마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넌 성격이 유별나
사람들은 다 이런 거 참으면서 살아
넌 결혼에 실패했어

 미치고 팔딱 뛸 노릇 아닌가! 나는 나름대로 가족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에 진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내막을 알면 더 가슴 아파할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건데, 어떻게 엄마가 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화가 났다. 막말로 결혼 준비하다가 잘못되면 가장 힘든 건 부모님이 아니라 당사자 아닌가? 그런데도 이상하게 죄인이 된 건 나였다. 그래도 끝까지 진짜 이유를 말하진 않았다. 사실을 말해 부모님 속을 후벼 파느니 원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감정 회복에 그렇게 오랜 시간을 쏟지 않았다. 바쁘게 일하고 운동하고, 원래 살던 대로 살다 보니 시간이 지났고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운 그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그즈음 내 곁에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고, 사랑을 시작했다. 구태여 부모님께 말하진 않았다. 좋은 소리 들을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나보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우리 엄마였다.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데, 엄마는 여전히 나를 걱정했다. 다시는 남자를 만날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계속해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나도 정신이 나갔는지, 결국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 말하게 됐다.


 “엄마, 나 남자친구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가 놀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딸이 생각보다 빠르게 예비 사위를 잊고 새로 교제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자 없으면 못 사느냐,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더 오래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 더 인내해야 한다…….’ 내가 무얼 실패했고, 왜 인내해야 하는 걸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어 버린 것이다.

“엄마는 아빠 말고 남자친구 없었어?”


 엄마도 이별하고 사랑을 해 봤을 텐데, 도대체 왜 내 이별과 새로운 만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도대체 왜 나보다 더 가슴 아파하고 끙끙 앓는 걸까?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엄마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를 알아야 했다. 엄마의 삶을 좀 더 알게 되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엄마 그리고 우리 가족을 인터뷰하기로 했다.


* 사생활 보호와 기타 이유 등을 위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개인정보는 조작(??) 및 비식별화 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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