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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재 Jul 25. 2023

노화

애호박볶음과 늙은호박전

  어머니가 지인으로부터 늙은 호박을 받으셨다. 늙은 호박,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어릴 적 친척 집에 가면 거실 한편에 꼭 한 덩이씩은 우두커니 놓여있던 누렇고 둥그런 늙은 호박. 원형이 작고 푸른색을 띠면 애호박이고, 점점 둘레가 커지고 껍질이 단단해지고 누런색으로 변하면 늙은 호박이 된다. 자라난 지 단 몇 개월 만에 ‘늙음’이란 명칭을 받아야 하는 호박이 새삼 애처롭다. 늙음, 나이 듦, 노화는 무엇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근래 친구들을 만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대화 주제는 노화이다. 만 나이 도입 전 불혹을 경험하고 다시 30대 후반으로 내려온 우리는 쾌재를 불렀지만, 만 나이는 만 나이일 뿐 몸 나이는 40대로 이미 들어섰다.


  친구 한 명은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단다. 하얗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만화 속 소녀처럼 앳되게 웃던 친구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잔주름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한다. 다른 친구 한 명은 눈 그늘이 아무리 푹 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고, 또 다른 친구는 무릎이 아파 한의원을 다닌다. 탈모와 지방 간과 콜레스테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소재다. 3040 세대에 노화가 급속도로 온다더니 벌써 이럴 일인가 싶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나를 비롯한 또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머릿결은 푸석하고, 피부는 탄력을 잃고, 얼굴에는 못 보던 잡티가 생겼고, 체력 소진은 급격하다. 거기다 작년에는 대상포진이 오더니 올해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관절염에 걸려 상반기 내내 고생했다. 책상 앞에 앉아있기 힘들어 조퇴를 일삼고 집에서는 주로 누워지냈다. 천장관절염이라고 했다. 천장관절은 ‘엉치 엉덩 관절’의 이전 말(※다음 한국어 사전)로 골반뼈와 엉치뼈가 만나는 그쯤이다.


  십여 전 출근길에 허리가 갑자기 아파 걷기 힘든 날이 있었다. 그 뒤로 통증은 한 번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부모님 모두 허리디스크가 있어 나 역시 허리가 약하구나 하고 지금까지 으레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허리를 쭉 펴서 앉아있기가 눈물 날 만큼 아팠고, 세수하러 허리를 굽힐 때면 세면대를 짚어야만 했다. 누워있다 몸을 일으킬 때는 여러 번 시도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일어났다.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아팠을 텐데요.”라고 했다. “네, 맞아요. 아플 때 누워서 쉬거나 스트레칭을 하면 좋아졌어요.”라고 답했더니, “이젠 그럴 나이가 아닙니다. 그동안은 젊어서 회복이 쉬웠지만, 이젠 그렇지 않아요. 노화라고 봐야지요.” 한다.


  본래부터 골반이 비틀어졌거나 잘못된 자세로 인해 생긴 염증인데, 앉아있을 때나 눕고 일어서면서 자세를 바꿀 때 통증이 많다고 한다. 비틀린 골반 상태에서 계속 걷고 움직이니 관절끼리 부딪치면서 염증을 유발했고, 그 영향이 허리까지 갔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치료 방법을 이어서 설명했고, 난 ‘이젠 그럴 나이가 아닙니다. 노화라고 봐야지요.’ 이 말 때문에 서러웠다.


  염증을 강화한 주된 원인은 한라산 등반이었다. 올 2월에 한라산 정상을 찍고 내려왔는데, 눈 덮인 겨울 산을 10시간 오르내린 산행이 내게는 무리였다. 더 나이 들면 못 올라갈 듯 해서 다녀왔건만, 후폭풍이 아주 거세다. 어머니는 사오십 대에 한라산을 지리산을 설악산을 소백산을 다녀오셨는데, 난 한라산 한 번으로도 후유증이 만만찮다. 어머니가 갖고 있는 그 체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도 체력은 약해. 체력은 약한데 하고 싶은 일은 해. 하고 싶은 일은 하는 사람이야.어머니에게 내재한 강인한 의지가 체력을 넘어서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살아온 날들과 내가 살아온 날들을 대조해 놓고 보면, 내가 한참 모자람을 느낀다. 10대부터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는 돈벌이를 일찍 시작하며 가장 노릇을 하셨다. 20대에 결혼하여 아이 둘을 키우며 장사하셨고, 30대부터는 부업까지 하며 가정을 탄탄히 꾸리셨다. 그러면서 집 안팎에서 일어나는 대소사를 척척 해결하고, 딸이 있는 서울로 아들이 있는 인천으로까지 마음을 뻗쳐 챙기셨다. 반면, 난 10대에는 차려주는 밥도 겨우 먹었고, 20대에는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30대에는 직장 하나 다니고 있으면서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다 해내고 모두 챙기고 살면 힘들지 않으시냐고 했더니, “힘들다는 생각을 왜 하노. 내 자식을 위하고 우리 가족을 위하는 일인데.” 하신다. 그래도 힘들지 않으시냐고 반문했더니, “힘들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지.” 하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하신다. 이런 긍정하는 마음들이 힘을 합쳐 어머니에게 생생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강인한 의지 앞에도, 무한 긍정하는 마음 앞에도, 다가오는 세월을 막지 못했다. 환갑이 지난 어머니에게서 전에 없던 모습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미간 주름이 이렇게 깊었던가. 워낙 잘 웃고 보름달처럼 밝은 표정만 짓고 살아온 어머니인데, 미간에 세로 주름이 화난 사람처럼 깊게 잡혔다. 노안이 오고 안경을 안 쓰면 미간을 찌푸리게 되니까 주름이 생겨버렸다고 한다. 보톡스 힘을 빌리면 주름을 펼 수 있다 했더니, “됐어. 그냥 살지 뭐.”하며 웃어넘기신다.


  허리 디스크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스트레칭을 하시는데도 통증이 간간이 온다고 한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서 계신 자세가 영 바르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 중심 잡기가 어려워 보였다. 어머니는 허리가 아파 똑바로 서 있기 힘들다고 하셨다. 허리 디스크는 수술받아도 똑같다며, 허리 운동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신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새벽에 자꾸 깨고 잠이 깊이 들지 않는데, 그때마다 스트레칭하면 되니까 마음 쓰지 말라고 하신다. “새벽에 깨면 뭐 하겠노. 스트레칭이라도 할 일이 있으니 감사하지.”


  “나이 들면 잠이 없다더니, 내가 요새 글타(그렇다). 잠이 왜케(왜 이렇게) 안 오노.” 잠이 잘 안 든다며 따뜻한 우유를 드시고, 카모마일 차를 드신다. 누군가에게 눈알 굴리는 운동을 하면 잠이 잘 온다는 말을 듣고, 잠들기 전에 해보신다. 그래도 잠이 들지 않으면 가족을 위해 기도를 드리신다. 몇십 년 동안 우리를 위해 감사 기도를 드리셨는데, 그 기도 시간이 점차 늘고 있다.


  “요새 이가 아파 옥수수를 잘 못 먹겠다. 내 옥수수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한 알 한 알 떼서 먹긴 먹는데, 이래(이렇게) 먹으니 재미도 없고 맛도 없는 것 같애. 하하하.” 여름이면 옥수수를 한 냄비 쪄서 순식간에 드시던 어머니였다. 옥수수가 글케(그렇게) 맛있다며 내가 한 자루 먹을 동안 세 자루는 거뜬히 드시던 어머니가 한 알씩 떼서 먹을 때는 그 답답함이 오죽하실까 싶다만은 “나이 드는데 별수 있나. 소화하는 게 어디로. 하하하.” 하신다.


  어머니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모른 척하고 싶었다. 어머니 신체 기능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상태를 못 본 척했다. 나에게 노화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시기는 어머니에게는 그 바람이 이미 관통한 후라는 사실을, 그래서 앞으로 더 약해짐을 알리는 바람이라는 사실을, 끝끝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나이 들어가는 어머니 모습을 애써 외면하려 했던 꽈악 고인 내 마음에 문장 하나가 잠방이며 물결을 일으켰다. 최장기간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마흔에게》를 집필하며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노화를 퇴화가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이를테면 계절은 봄에서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로 바뀌는데 각각의 계절마다 특성이 있기 때문에 다른 계절과 우월을 가릴 수 없습니다. 즉, 노년의 삶은 청년의 삶과 비교할 대상도 아니고 결코 뒤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기시미 이치로, 마흔에게(다산북스, 2018), 6.

 

  노화는 변화이다. 우리는 모두 변화하는 존재이지 퇴화하는 존재가 아니다. 한 끗 차이인데,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낫다.


  마트에서 보는 길쭉한 애호박과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늙은 호박은 품종이 다르다고 한다. 마트 애호박이 자라서 늙은 호박이 되지는 않지만 어찌 됐든, 애호박이든 늙은 호박이든 본질은 호박이다. 나이 들어간다고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지 않고, 내가 내가 아니지 않듯이. 애호박은 애호박대로 풋풋한 내음으로 볶음이건 무침이건 그 몫을 해내고, 늙은 호박은 늙은 호박대로 전이건 죽이건 그 몫을 해낸다.


  늙은 호박은 애호박과는 다르게 달큼하고 진한 맛이 있다. 어머니가 늙은 호박을 받았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말을 보태셨다. “귀한 호박을 받아왔데이. 요새 잘 못 봤는데, 늙은 호박이 귀하고 좋데이.” 그렇다. 늙을수록 귀하다. 어머니도, 나도, 모두가 점점 귀하고 달큼하게 변화하고 있다.


애호박볶음
늙은 호박이 보이는 가을쯤, 전을 부쳐야겠다.








어머니가 알려준 그대로, 정리하지 않은 조리법

애호박볶음


애호박 1개를 약간 도톰하게 썬다. 3cm 정도

양파채 썰고

청양고추 2개 썰고

소금으로 버무린다. 살짝 절인다.

참기름, 깨소금 넣고

볶는다.

뚜껑 덮고 약한 불에 5분 정도 둔다.



늙은호박전


늙은 호박 속 숟가락으로 긁어내기

밀가루, 소금으로 간하기




* 태평양 건너 온갖 식재료가 대형마트에 다 있건만, 늙은 호박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귀하다.

  늙은 호박이 없어 단호박으로 전을 해보았는데 냄새는 얼추 비슷했으나 그 맛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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