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 혈관도 손끝 감각도 오감을 자극하는 감성도 모든 신체 기관이 얼어붙었다. 쌀쌀한 영하권 날씨 속 12월 도서관은 추워도 너무 추웠다. 나무로 만든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도서관을 숲으로 부르건만. 눈 내린 겨울 산은 아름답기라도 하지 겨울 도서관은 썰렁하기만 하다. 도서관을 찾던 아이들 모두 숲속 동물들을 따라 겨울잠을 자러 갔는지 인기척 하나 없는 도서관은 냉기만 감돈다. 올해 옮긴 학교도서관은 오래된 학교인 데다 동향 건물 복도 끝에 있어서인지 유독 춥다.
발열 내의를 입고, 옷을 여러 겹 껴입고, 롱패딩을 걸친 뒤 털부츠를 신는다. 두꺼운 양말을 두 켤레 신은 탓에 부츠 신기가 여간 쉽지 않다. 낑낑거리며 부츠를 겨우 끌어올린다. 중무장한 모습이 영락없는 곰이다. 겨울잠 자고 싶은 곰이 인간행세를 하려고 지하철역으로 살금살금 걸어간다. 겨울은 길이 미끄러워 평소보다 5분 일찍 집에서 나오는데, 껴입을 옷과 신발 때문에 5분을 더 앞당겨 움직여야 한다. 가뜩이나 겨울은 해가 늦게 떠서 일어나기 힘든데 말이다. 해가 늦게 뜨니 출근은 오전 10시까지 하세요, 겨울 근무는 4시간만 하겠습니다, 입동이 오면 겨울 방학입니다, 아침마다 희망 회로를 돌리며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는다. 옷을 몇 겹씩 껴입고 사람 많은 지하철을 타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갑갑한데, 겨울 도서관에서 8시간 버티려면 이렇게 입고 출근하는 수밖에 없다.
추워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콧물이 흐르고, 손발이 시려서 일하기 힘들다. 집에 돌아와 얼었던 몸을 녹이며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춥다고 징징대자 어머니는 걱정 어린 잔소리를 시작한다. “옷을 두껍게 입고 가야지, 보온 잘 되는 신발 찾아봐, 목도리는 꼭 하고.” 평소 잔소리가 없는 분인데, 잔소리 장치가 가동되는 영역은 밥걱정 외에 단 하나, 추위 걱정이다. 추우면 감기 걸린다, 몸이 차면 없던 병도 생긴다, 춥게 지내면 사람이 궁색하다고 겨울이면 어머니 잔소리가 늘어난다.
찬 바람이 불면 어머니는 내복을 꺼내셨다. 어린 남매는 내복 바람으로 집안을 돌아다녔고, 내복이 곧 잠옷이었다. 손을 씻을 때면 도톰한 내복 소맷단을 접어 걷어 올려주셨고, 밖에 나갈 때면 내복 소매 끝으로 바람이 들어올세라 옷매무새를 몇 번이나 가다듬어 주셨다.
겨울이면 내복을 마땅히 입어야 하는 줄 알았던 나는 교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내복 거절 뜻을 밝혔다. 교복 치마에 내복을 어떻게 입으랴. 어머니는 기모 스타킹을 사 오셨는데, 난 기모 두께만큼 다리가 굵어 보인다는 까닭에 그 스타킹을 신기 싫었다. 합당한 구실을 찾자면, 그땐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였다. 학교 친구들은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교문을 들어설 때 생활지도 선생님 눈을 피해 벗었다가 교실로 들어가면 다시 체육복 바지를 입었다. 나도 그랬다. 어머니가 사주신 기모 스타킹은 옷장에 넣어두고 얇아 보이는 스타킹을 신고 체육복 바지를 챙겨 학교로 갔다. "멋이 뭔지도 모르고, 추운 날 추워 보이게 옷 입으면 제일 멋없다."라는 어머니 잔소리를 뒤로 하고.
춥긴 추웠는지 내복 상의는 꼭 입고 다녔는데, 그 시기 내복 색깔은 왜 그리도 형형색색이었는지. 90년대 후반엔 지금처럼 검은색 발열 내의가 없었고 분홍색, 빨간색, 보라색 같은 색이 많았다. 흰 와이셔츠 교복 안에 선명한 원색 내복이라니. 그러다 학교에서 체육복을 갈아입다가 친구들은 아무도 내복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복이 갑자기 싫어졌다. 합당한 구실을 찾자면, 그땐 또래 집단행동에 쉽게 동조되던 사춘기였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 친구들을 따라 했다.
고등학생 때였다. 어머니가 패딩을 하나 사주셨는데,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코트가 유행했다. 친구들은 날씬해 보이는 코트를 입고 다닌다고 나도 코트를 사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시내에 있는 옷 가게에 나를 데려가셨다. 그곳에서 나를 가장 날씬하게 보여줄 코트를 골랐다. 매장 안 거울 앞에서 이리 비춰보고 저리 비춰보며 신이 난 내 옆에서 어머니는 말했다. "패딩이 따뜻하고 좋은데, 유행이 뭐라고." 합당한 구실을 찾자면, 그땐 유행하는 문화에 집착하던 사춘기였다. 유행은 짧고도 짧은 법. 어느 순간 그런 코트를 입는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값이 좀 나갔던 옷으로 기억해 차마 버리지는 못했지만유행 지난 코트는 내게 금세 잊혔고, 어느 날 어머니가 기장을 반으로 수선해 재킷처럼 입고 있는 모습을 봤다.
자취하면서 목감기에 심하게 걸린 적이 있다. 전화 너머 어머니 잔소리 장치에 전원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병원은 갔다 왔나. 또 옷 얇게 입고 다녔지. 멋 부리다 얼어 죽는다 야야. 보내준 대추로 물 끓여 마시고 있나. 목이 따뜻해야 한데이. 목도리는 필수다. 목감기엔 뭇국이 좋은데. 당장 무 사 와서 뭇국 끓여 먹어라. 귀찮아도 마트 갔다와래이. 무 사와라 무. 지금 바로 갔다 와라.
차라리 내가 무가 되어 땅속에 뿌리박히고 싶었다. 방바닥에 딱 붙어 꼼짝도 하기 싫었지만, 전화를 끊고 마트를 다녀왔다. 어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무를 채 썰고 쌀뜨물을 부어 푹 끓였다. 목이 부어 무가 넘어갈 때마다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꼈지만 뜨끈한 뭇국이 들어가자 내복을 입은 듯이 몸이 따뜻해졌다. 이 딸이 무를 사 와서 뭇국을 끓여 먹었을 시간까지를 계산한 어머니는 내게 다시 전화하셨다.
뭇국 끓여 먹었나. 진작 옷 좀 두껍게 입고 다니고 밥도 잘 해 먹으면 감기에 안 걸리잖아. 목에 손수건 두르고 있어라. 약 먹고 푹 자고.
어머니한테 잔소리 들으며 처음 끓여 먹었던 뭇국은 겨울이면 해 먹는 음식이 됐다. 도서관이 추워서 일하기 힘들다고 하자 어머니는 이제 겨울 잔소리에 덧붙여 무를 예찬한다.
무가 참 좋은데. 무생채도 좋고 무전도 맛있고 뭇국도 시원하고 좋데이. 무 성질이 따뜻해서 겨울에 먹으면 좋아. 방학 동안 좀 해 먹어라.
겨우내 해 먹으라고 어머니가 지난가을에 보내주신 무가 한가득하다. 가을무가 그리 맛있다고. 냉장고 채소 칸을 꽉 채우고 있는 무를 보니 체온이 벌써 뜨끈하게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