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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재 Dec 04. 2022

짠내나던 날들

장볶이

  욕실에 갇힌 이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달라지기 위해 애썼다. 시간이 지나 기업체 자료실 근무일이 만료됐고, 취업 전쟁터에서 다시 싸워야 했다. 궁한 생활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자고 하는 이에게 영화관은 답답하다는 핑계를 댔다. 정말 보고 싶은 영화는 구립 기관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미디어 콘텐츠 제공 사이트에 월정액 오천 원을 지불하고, 각종 드라마와 영화를 봤다. 친구는 내게 드라마 보기가 취미라서 다행이라고 했다. 인정했다. 드라마와 영화는 촬영지를 찾아가 볼 정도로 좋아하니까. 가까운 친구들과는 공원이나 산에 다니면서 시간을 보냈고, 문화생활은 무료 관람 박물관과 미술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매달 마지막 수요일이면 ‘문화가 있는 날’에 맞춰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행사를 제공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매우 고마웠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궁색한 주머니 사정을 들키지 않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부분은 겉모습이었다. 꾸미기 좋은 나이 이십 대 후반, 만나는 이들은 신상품 이야기하기 바빴고 만날 때면 새 옷을 입고 새 가방을 들고나왔다.

  유행하는 옷을 매번 따라잡기가 벅찼고, 원가 저렴한 원단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옷들 사이에서 싼 옷 더 싼 옷을 찾았다. 그마저도 부담될 때는 기증품 판매처를 기웃거렸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친구 한 명이 취기가 심해 숙취해소제를 사다 주면서, 값을 말했다. 삼천 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친구는 이제 우리 나이에 천 원 따위는 따지지 말자고 했다. 탄탄한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라 그럴 수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그랬지만, 그 시기 나에게는 천 원도 귀했다. 천 원이면 애호박 한 개를 사서 볶아 놓고, 아껴먹으면 세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난 벼룩이었다. 간을 내줄 수 없었다.

  그랬다. 당시 내게 천 원은 귀했다. 1~2천 원이면 애호박, 가지, 버섯을 사 와서 볶아두고 며칠간 먹을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요리 수준에서 필요한 재료를 사는 데 필요한 액수였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어머니가 만들어서 냉동시켜둔 음식을 꺼내 먹었다. 지금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때는 요리가 심하게 서툴던 때라 해동한 미역국에 맹물 맛이 날 때까지 물을 몇 번이나 부어 여러 끼니를 먹었고, 제육볶음은 고기 먹고 남은 양념을 모아놨다가 밥만 넣어 볶아 먹었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 중에서 오래도록 여러 번 나눠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은 장볶이(볶은고추장)였다. 어머니는 잘게 간 돼지고기에 양파와 고추를 다져 넣어 고추장에 볶아 반찬통 가득히 담아 주셨다. 간간한 장볶이 한 숟가락이면 밥 한 공기는 충분했다. 그러다 반찬통 바닥이 보일쯤이면 밥 한 숟가락에 점 하나 찍듯 장볶이를 올려 아껴 먹었다. 장볶이는 애처롭도록 짭조름했다.


  생활은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문제는 재취업이었다. 2년 경력을 쌓는 동안 갓 졸업한 대학생이 늘었고 기관에서는 하나같이 젊은 사람을 선호했다. 세상이 내게 연거푸 들이붓는 고배를 내뱉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삼켰다.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했고, 혹시나 중간에 취업이 될까 싶어 당일, 일주일, 1개월 길어봤자 3개월 자리만 찾았다. 어머니에게는 사정을 속속들이 말하지 않았다.


  당일 아르바이트로 설문 조사 참여, 학습지 홍보물 포장, 온라인 강의 스토리보드 검수, 공연장 질서 유지 등을 했는데, 일거리가 날마다 있진 않았다.

  육체 피로가 심했던 일은 출장 뷔페였다. 자취방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되는 곳까지 아침 일찍 도착해서 집기류를 옮겼다. 숟가락이 여러 개 쌓이자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음식이 담긴 쟁반은 말할 것도 없다. 음식이 아니라 돌덩이였다. 하긴, 쇳덩이면 어떻고 돌덩이면 어떠랴. 내 처지보다 무거울까.

  해질 때까지 일하고 받은 일당은 7만 원가량이었다. 고생 많았으니 값이 나가더라도 맛있는 저녁을 먹고 들어가자는 마음으로 식당가를 걸었으나 만 원이 넘는 음식값을 보니 망설여졌다. 먹고 나면 사라지는 돈이 아까웠다. 먹을까 참을까. 먹어 말아. 먹자 참자. 결정을 못 하고 터벅대며 걷는 중 문자가 왔다. 친구 결혼 소식이었다. 내적 갈등은 허무하게 끝났다. 일당은 축의금으로 고이 모셔서 뒀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사서를 뽑는 곳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이때 진로 고민을 참 많이 했다. 전공을 살려 취업 문을 두드렸을 땐 잘만 열렸는데, 사서를 하려니 왜 이렇게나 꽉꽉 막혀 있는 건지. 전공 분야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사에 합격했고, 연봉 높은 곳에 거뜬히 합격했고, 사립대 교직원으로 한 번에 합격했다. 그런데 사서는 왜. 난 사서로서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인가. 지난날 어디든 합격했던 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서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메일 보관함을 열었다. 사립대 교직원에 합격했을 때 나를 좋게 봐준 팀장님께서 보내준 메일이 있다. 짧게 만났지만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내 의견을 존중해주고 응원해주신 분이다. 메일에 적혀 있는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도 어려운 세상입니다.’라는 문구는 어려운 세상 속에서 표류하는 나를 지탱하게 했다. 내가 사서로서 부적합해서가 아니라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된다고 위로해주는 듯했다.

오랜만에 열어 본 메일_메일 일부


  어차피 하는 아르바이트인데 책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변환하는 업체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변환이 잘 됐는지 한 장씩 대조하며 확인하는 단순 검수였다. 이 일이 끝나고는 온라인 서점에서 책 정보를 입력하는 일을 했다.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책 검색을 했을 때 나타나는 서명, 저자명, 책 소개 글 등 기본 정보를 입력하는 일이었다. 단순하고 지루했지만, 책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견딜 수 있었다.


  생활비에 치이면서도 돈을 많이 준다는 회사, 사서가 아닌 직업은 하고 싶지 않은 나를 보며 사서가 되고 싶다는 꿈이 간절함을 알 수 있었다. 간절함은 결국 학교도서관 사서 자리에 합격하게 이끌었고, 사서가 된 3년째 신혼집이 생기면서 자취방에서 나왔다. 짠내나던 날들은 그 방에 파묻어 두고 나왔다.










어머니가 알려준 그대로, 정리하지 않은 조리법

장볶이


잘게 간 돼지고기를 끓는 물에 넣고 핏물과 기름기 빼기

찬물에 헹군 다음 기름 없이 고기만 달달 볶기

양파, 마늘, 고추 다져서 볶기

고춧가루 살짝, 후추

매실 또는 도라지 진액 조금

고추장과 된장 동량(2숟가락)으로 넣고 볶기

다 볶을 때쯤 참기름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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