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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재 Oct 10. 2022

서울 열망

된장찌개

  얼마 전 대상포진에 걸렸다. 도서 재배치 작업을 한데다 장서 폐기까지 했더니 몸에 결국 탈이 왔다. 오른쪽 허벅지에 바람만 스쳐도 통증이 생기더니 며칠 뒤에는 수포가 올라왔다. 피부과 의사는 일찍 발견해서 크게 번지진 않을 거라고 했다. 수포는 일주일 정도 지나자 가라앉았고 지금은 딱지만 검게 남아있다.

  어머니는 “그거 많이 아픈데, 나도 두 번이나 걸렸었잖아.” 하신다. 한 번은 내가 기억하는데 다른 한 번은 언제일까. 어머니에게 물으니 내 자취방 구할 때라고 답하신다.

  “자취방 구할 때요? 처음 듣는데요?”

  “말 안 했지. 며칠 가렵다가 약 먹으니 낫던데 뭘.”

  어머니는 모기한테 물려 가려운 곳을 긁었을 뿐이란 듯이 가볍게 말씀하셨다. 그거 많이 아팠다면서.




  대학 원서 접수 시기, 독립을 꿈꾸던 난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독립을 원한 까닭은 부모님께서 정해둔 몇 가지 규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밥 먹을 때 딴짓하면서 먹고 싶었고, 늦잠을 자고 싶었고, 밤늦게까지 티브이를 보고 싶었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길게 하고 싶었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고 싶기도 했다. 당시 다른 지역에 있는 사립대와 내가 살던 지역 국립대에 합격했는데, 아버지는 국립대를 두고 다른 지역으로 왜 가느냐며 반대하셨다. 타지에 딸을 보내기가 걱정됐을 테고, 사립대 학비 부담도 있겠다 싶었다. 타지 대학교 학과가 간절했던 분야도 아니었고, 지역에 머무를 때 생기는 경제적 여유와 안정감 같은 여러 장점에 결국 설득당했다. 독립할 첫 번째 기회는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기회는 취업이었다. 취업만은 이 지역을 반드시 벗어나리라 다짐했다. 독립생활 의지에 서울살이 갈망이 보태졌다. 서울로 대학에 간 친구들 싸이월드에 올라오는 별다방(스타벅스)과 콩다방(커피빈)에 가고 싶었고, 남산타워에 오르고 싶었고, 청계천을 걷고 싶었다. 서울은 식당에서 밥 먹다가 연예인을 본다더라, 서울은 놀거리가 많다더라, 서울에는 움직이는 길이 있다더라. 무빙워크를 말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2000년 초반 안동에는 무빙워크와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건물이 얼마 없었다. 오죽하면 그 시기 고3 수험생들이 수능 끝나면 가고 싶은 곳이 이마트라고 했을까. 이마트에 엘리베이터 말고 움직이는 길이 있대. 계단식이 아니야. 수능 무렵 대형 마트가 개점한다는 소식에 소도시 수험생들은 카트를 끌고 무빙워크를 타는 모습을 상상했다.


  서울을 향한 열망은 점점 더 커졌다. 드라마 속 촬영지에 가고 싶었고, 노랫말에 나오는 장소에도 가고 싶었다.

노란 풍선은 하늘로 오르고
광장엔 많은 사람들
모두가 즐거워
혼자인 것도 나쁘진 않았어
하지만 가끔 이런 날
혜화역 근처 그 벤치
누군가 곁에 있어 줬으면
바람 너무 시원해
발걸음들 가벼워

-권진원 노래 〈노란 풍선〉 중에서

  ‘혜화’라는 동네 이름이 예뻐서 옮겨 적은 노래 가사에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노래를 들었고, 결국 난 서울에 있는 직장에 취업했다. 우연이었지만 여러 곳에 원서를 내고 합격한 첫 직장 위치는 혜화였다. 혜화라니! 〈노란 풍선〉 속 혜화라니. 아쉬워하는 부모님 속도 모르고 마냥 설레는 마음으로 혜화역 인근에 있는 고시원을 계약했다. 근무 시작일이 촉박해서 자취방을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한 달에 30만 원 방과 35만 원 방이 있었다. 개인 욕실이 있는 방에 5만 원이 더 붙었다. 부모님은 공용 욕실은 불편하다며 선금 35만 원을 냈다. 한 평 남짓한 방 안에 부모님과 다닥다닥 누워 움직임이 허락되지 않는 정자세로 서울에서 첫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부모님은 내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내려가셨다. 회사 사람들은 사투리 쓰는 내 말투를 이상하게 봤고, 팀장님은 전화 업무가 많으니 사투리를 고쳐 달라고 했다. 점심은 근처 국숫집 가서 먹자고 했다. 간장 국수가 짜기만 했다. 퇴근하고 들어간 고시원은 적막했다. 좁은 방에 짐들이 꽉 차 있는데 휑했다. 누구 하나 내게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는데 갑갑했다. 텅 빈 마음으로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공용 주방으로 갔다. 고시원 총무가 밥을 해뒀는데 늦게 가면 밥에 찰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출근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 중 한 명이 상추를 가져왔다며 통조림 참치를 싸 먹자고 했다. 퇴근 후에는 환영식을 해준다고 했다. 직원들은 모두 술을 잘 마셨다. 주량이 약한 내게 사이다라도 마시라고 했다. 그들이 비우는 소주잔 속도에 맞추라고 했다. 사이다에 취할 지경이었다.


  서울에 온 셋째 날 입가에 작은 물집이 하나 생겼다. 오후가 되자 두 개가 됐고, 두 개가 네 개가 되더니 매우 빠른 속도로 퍼졌다. 하룻밤 자고 나자 입이 벌어지지 않을 정도로 온 입가를 둘러쌌다.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병원에서 단순포진이라고 했다.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생긴다고 했다. 어머니는 당장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 서울, 노래하더니만 오자마자 병을 얻었냐고 하셨다. 어머니는 고시원 환경 탓을 하며 자취방을 빨리 구하자고 하셨다.


  혜화동에 있는 부동산에 갔다. 서울 자취방 시세를 몰랐던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로 기껏해야 백만 원만 벌어봤던 나도 천만 원이 넘는 보증 금액에 놀랐다. 공인중개사가 소개해주는 방들을 하나씩 볼 때마다 어머니 얼굴은 어두워졌다. 방 한쪽 구석에 핀 곰팡이는 기본이고, 어린아이도 조금만 힘주면 부서질 만큼 보안이 약한 출입문,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방, 화장실 변기 앞에 싱크대가 있는 방, 후미진 골목 끝 방. 어머니는 20년 넘게 옆에 끼고 곱게 키운 딸을 그런 곳에 둘 수 없었다.


  혜화동 일대를 걸으며 한 정거장 더 간 곳은 한성대입구역이었다. 상점 간판에 삼선이라는 글자가 많이 보이길래 이 동네 이름이 삼선동이구나 했다. 어머니는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가진 돈에 맞는 깨끗하고 안전한 방을 찾아달라고 했다. 공인중개사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다른 부동산을 가보자며 또 걸었다. 걷다 보니 삼선점이라고 적혀있던 간판 글자들이 돈암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이 보였다. 지하철 두 정거장을 걸은 데다 방 보러 그 일대를 구석구석 걸었던 어머니와 나는 너무 지쳤다.


  다음 날 어머니는 나를 출근시키고 성신여대입구역으로 가셨다. 그 동네에 자취방이 많아 보였다고. 서울 지하철과 버스가 헷갈릴 텐데 어머니 혼자 괜찮으려나 걱정이었다. 어머니는 어제 부은 발이 가라앉기도 전에 부동산을 다시 들락날락하셨다.

  어머니는 왠지 정감이 가는 어느 부동산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A4 용지에 반듯하게 컬러 인쇄해서 원룸 안내문을 붙여둔 다른 부동산과 달리 손으로 대충 휘갈겨 쓴 원룸 안내문 글씨에 끌리셨단다. 부동산 문을 열자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님 한 분이 계셨다. 할아버지 공인중개사는 알맞은 곳이 있다며 어머니를 데리고 가셨다. 할아버지 공인중개사를 따라간 곳은 상가 건물 2층에 있는 원룸이었다. 지금까지 본 방보다 컸고, 유해시설이 없고, 근처엔 500세대 아파트가 있는 주택가 상가 건물이라 위험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바로 계약하고 근무 중인 내게 연락하셨다. 자취방을 구했으니 그쪽으로 퇴근해라. 주소는 성북구 안암동이었다.


  어머니는 자취방을 계약하고 혜화동으로 돌아와 고시원 총무에게 선입금한 금액에서 일주일 치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환급해달라고 했다. 고시원에서는 그렇게 해줄 수 없다고 했다. 환급받지 못한 돈 보다 딸 건강이 우선이었던 어머니는 가타부타 말할 필요 없고, 시간 낭비도 싫다며, 짐만 챙겨 나오셨다. 어머니는 혜화동에서 안암동까지 짐을 옮겼다. 홀로.


  처음 보는 주소로 찾아갔더니 고시원보다 세 배나 넓은 방 안에서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다. 재료는 언제 다 챙겨 오셨는지, 마트에서 산 재료가 아니라 안동에서 가져온 재료였다.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등. 어머니는 방을 못 구하면 안동에 안 내려갈 생각이셨단다. 방 구하면 먹을거리가 필요할 테니 재료 몇 가지만 챙겨왔다고 했다.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들어 먹자며 된장찌개를 뚝딱 끓이셨다. 어머니가 저녁 준비를 할 동안 방 안을 둘러보니 수저, 컵, 그릇, 냄비를 비롯한 가재도구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찌개 간을 보면서 밥상과 빨래 건조대를 사야겠다고 하셨다. 근처에 마트가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재래시장도 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종일토록 내가 지낼 곳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마련하고 계셨다.


  자취방 구하던 날 기억은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 대상포진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가 잊고 있던 기억을 다 끄집어내셨다. “내 그때 니 방 구해주고 대상포진 걸렸잖아.” 서울에 딸을 두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안동에 내려갔는데, 서울 간 지 3일 만에 말도 못 할 정도로 입가에 수포가 번졌으니 걱정에 걱정이 더해졌다. 거기다 낯선 동네를 발이 닳도록 누비고 다니셨으니 몸이 견뎌낼 수가 있나.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꿈꿨던 독립생활이라며 들뜬 날들을 보냈다.


  “어머니, 다른 건 몰라도 그때 끓여주신 된장찌개는 맛있게 먹었어요.”

  “된장을 끓여줬나. 모르겠다. 나는 니 입에 올라왔던 수포만 생각하면 속상하다.”

  어머니 기억엔 내가 아팠던 모습만이 크게 남아있다. 어머니와 이야기하며 잊고 지낸 날을 떠올리니 그때 먹었던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 오늘 저녁에는 된장을 끓여야겠다.







어머니가 알려준 그대로, 정리하지 않은 조리법

된장찌개


된장 2 숟가락, 고춧가루 1 숟가락, 멸치 5~6마리

청양고추, 애호박 반 개 정도, 두부 반 모, 파 또는 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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