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남매인 어머니 식구들과 육 남매인 어머니의 사촌 식구들이 만든 남매 계 모임이 있다. 남매 계는 경조사 챙기기는 물론이고 때마다 여행을 다닌다. 이중 이모가 다섯 명이다. 어머니는 이모들이 사는 지역명을 붙여 서울 이모, 인천 이모 이렇게 구별하여 알려주셨다. 이모들 모임은 언제나 화기애애하다. 어느 집이 맛있다더라, 어디에 볼거리가 많다더라, 이 음식은 어떻게 만들었느냐, 언니 음식 솜씨가 최고다 등등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남매 계라고 하지만 자매들 활동이 중심이다.
나이 들수록 자매와 보내는 시간이 그리 즐겁다고 하는데, 남동생 하나뿐인 나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서로 사정을 깊숙이 알고, 각기 다른 자매들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아 다투더라도 금세 풀리는 자매가 부럽다. 도울 일은 돕고, 기쁜 일은 축하하고, 슬픈 일은 같이 마음 아파하고, 함께 쇼핑하고, 함께 여행가는 그런 자매, 언제 어디서 만나도 편한 사이인 자매가 부럽다.
아버지 본가에 가면 사촌 언니들이 많았다. 부엌에서 간식거리를 한 접시씩 가져오는 언니, 공포 이야기를 들려주는 언니, 그림을 그리며 동생들과 놀아주는 언니, 최신 유행가를 알려주는 언니. 언니들 틈에서는 가만 웃고만 있었다. 반면, 어머니 본가에서는 내가 첫째였다. 남동생을 포함해 사촌 동생들이 여섯 명이었는데, 어른들은 내게 동생들 잘 돌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통솔력이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던 나는 그럴 때마다 없는 언니를 찾았다.
어머니는 서울 이모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사촌 언니인 서울 이모는 동생을 챙기고, 그 동생의 딸까지 알뜰히 챙기신다. 한 아파트 단지에 살고 계신 이모는 어느 날 닭볶음탕을 냄비째로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또 어느 날은 보온 도시락에 카레를 담아 오셨다. 서울에 올라오고 본 이모 베풂이 이러한데,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도 분명코 차고 넘쳤겠다. 이러니 언니란 존재는 동생으로서 기대고 싶은 사람이고, 생각건대 맏이인 어머니도 나처럼 언니를 원했지 않을까 싶다.
언니가 없다면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남동생과 사이가 좋지만, 이성보다는 동성 간에 통하는 정서와 취향 폭이 더 넓을 테니 말이다. 여동생을 바라는 마음은 사촌 동생들을 통해 메웠다. 올 초에 외사촌 동생이 한라산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흔쾌히 답했고, 이종사촌 동생도 동행했다. 셋이 하는 여행은 처음인 데다, 여행 가는 자매가 늘 부러웠기에 한참 전부터 설레었다.
공항에서 만난 동생들은 내 여행 가방을 보자마자 “언니, 짐이 이게 다야?”라고 했다. 나는 어딜 가나 단출하게 다니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제주도에서 서로 다른 성향을 하나씩 발견했다. 외사촌 동생 현이는 이동 거리와 동선을 고려하며 음식점을 찾았고, 이종사촌 동생 은이는 무얼 먹어도 어딜 가도 다 좋다고 했다. 2박 3일 머무는 동안 현이는 그때그때 짐 정리를 했고, 나와 은이는 살짝 몰아서 했다. 산행 방식도 달랐다. 현이는 성큼성큼 올라가 쉬면서 뒤따라오는 우리를 기다렸고, 은이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올랐다. 나는 앞에서 당겨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동생들 사이에서 한 발짝씩 올라갔다.
한라산 산행은 힘겨웠다. 산을 오른 지 두 시간쯤 지나자 온통 눈밭이고, 기온은 내려가고, 체력이 달렸다. 중간중간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동생들은 언니 힘내라며 물을 주고 초콜릿을 주면서 백록담까지 나를 이끌고 갔다. 하산 길은 한층 더 고행이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났고, 돌이 많은 길이라 걸을 때마다 발가락 끝이 아팠다. 나중 일이지만 양쪽 새끼발가락이 빠졌을 정도니까 엄살이 아니었다.
나와는 다르게 동생들은 힘차게 내려갔다. 속도가 더딘 나 때문에 예정보다 하산 시간이 늦었고, 그 탓에 숙소로 돌아가는 셔틀버스를 놓쳤다. 그런데도 동생들은 군말 없이 나를 기다렸고, 천천히 내려가도 괜찮다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 이모 집 앞마당에서 천진하게 뛰어놀던 어린 동생들이 언제 이만큼 의젓하게 컸나 싶었다. 순간, 차갑게 휘날리던 한라산 바람이포근하게 바뀌는 듯했다. 동생들 잘 돌보라는 어른들 말씀에 부담을 느꼈던 지난날이 무색했다.
어머니에게는 여동생 한 명이 있다. 이모는 어머니와 목소리, 말투 그리고 웃을 때 표정이 닮았다. 눈코입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참 다른데도 쌍둥이처럼 비슷하다. 근거리에 사는 이모와 어머니는 자주 만난다. 사전에 약속하지 않았더라도 이모에게 “오늘 저녁, 같이 먹자.”라는 연락이 오면 바로 만난다. 이모네 식구가 우리 집으로 오면 어머니는 외삼촌에게 전화하신다. 그러면 외삼촌네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곧장 온다. 어머니는 저녁 준비를 빠르게 하고, 이모가 만들어 온 반찬을 상에 올리고, 후식으로 외삼촌이 사 온 과일을 먹는다.
저녁을 먹고 나면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시간을 보내다 어머니가 윷가락을 꺼내면 모두 거실에 빙 둘러앉는다. 그때부터 윷놀이를 시작한다. 성씨 따라 전가네, 박가네, 남가네로 편을 나누기도 하고, 성별 따라 여자 대 남자로 편을 나누기도 한다. “모야. 모야. 모야.”를 외치는 소리에 맞춰 윷가락이 던져지고, 떨어지는 윷가락에 다들 시선을 집중하고, 뒤집힌 윷가락에 환호하거나 좌절하는 소리가 오간다. 이모가 던진 밥 먹자는 한 마디가 온 집안을 순식간에 흥겨움으로 가득 채운다.
방학 때면 시골 이모 집으로 가곤 했다. 겨울방학에는 뒷산에서 비닐포대로 썰매 탔고, 여름방학에는 도랑에서 물장구쳤다. 밭일하는 이모를 따라가 그늘에 앉아 수박을 먹고, 사촌 동생들과 동네에서 숨바꼭질하고, 잠자리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그러고 나서는 씻으러 들어간 커다란 고무대야에서 물을 뿌리며 놀았다. 한바탕 뛰어놀고 시원하게 씻고 난 아이들한테 이모는 국수를 비벼주셨다. 비빔국수는 한여름에 실컷 놀고 난 다음, 큰 양푼에 국수와 양념장을 넣고 쓱싹쓱싹 비벼 그 자리에서 여럿이 나눠 먹어야 맛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비빔국수는 어머니도 잘해주시던 음식이다. 내가 워낙 좋아하는 까닭도 있지만, 갑자기 모인 손님에게 손쉽게 내어내는 음식 중 하나가 국수였다. 결혼하고 처음 비빔국수를 할 때였다. 국수를 삶던 물이 넘쳐흐르고, 달걀지단은 두껍고, 일정한 크기로 잘라 예쁘게 고명으로 얹으려던 김은 삐뚤빼뚤했다. 어머니는 "김은 안 넣어도 되는데 넣고 싶으면 비닐봉지에 넣고 비벼서 뿌리면 되고, 달걀은 지단 아니어도 돼. 애호박 볶을 때 같이 넣고 볶아. 비빔국수는 후딱 비벼 먹어야 맛있데이." 라며 간단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찬물에 헹군 국수에 양념장을 부은 뒤 달걀, 애호박, 오이를 넣으려는데 모아둔 재료들이 마치 옹기종기 둘러앉은 자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김새와 맛이 다른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내는 비빔국수처럼 저마다 다른 성향인 자매들이 재잘대며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매콤하게 휘어잡는 첫째 언니, 새콤하게 톡 쏘는 둘째 언니, 달콤하게 벙긋벙긋 웃는 막냇동생이 잘도 섞이어 경쾌하게 비벼졌다.
외할머니 기일에 친척들과 모인 자리에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너네 셋이 한라산 정상 찍고 온 일은 평생 두고두고 이야기할 좋은 추억거리데이. 언제 또 그래(그렇게) 가보겠노. 셋이 값진 경험 했다!” 값진 경험을 함께한 동생들이 가까이 살고 있다면 지금 당장 전화해서 부르고 싶다. 국수 삶아 비벼 둘 테니, 우리 집으로 어서 오라고. 국수가 붇기 전에 어서 오라고.
어머니가 알려준 그대로, 정리하지 않은 조리법
비빔국수
물이 끓으면 국수를 넣고(넘치는지 꼭 확인)
뚜껑 덮어놔
국수 익었으면 찬물에 헹궈 팍팍
소쿠리에 건져
양념 버무린다. 양념은 미리 해라!
양념-애호박 볶은 팬에 달걀 1개 풀어서 뚜껑 덮으면 달걀이 익어요 + 오이 채 썰고 + 고추장 + 고춧가루 살짝 + 식초 살짝 + 설탕이나 꿀 살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