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재 Aug 27. 2023

아침 라디오

풋고추 전

  쟁반 같은 동그란 원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톱니바퀴 모양 구멍이 두 개 뚫린 네모난 플라스틱을 넣으면 음악이 나왔다. 시계 초침처럼 작은 바늘을 이리저리 옮기면 지지직 소리를 내다가 사람들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키만 한 전축에서 나오는 갖가지 소리가 흥미로웠다. 전축 수납장 유리문을 여닫을 때 나는 딸깍 소리조차 재미있어, 유리문을 수없이 여닫으며 전축 앞에서 노는 시간을 즐겼다.


  수납장 안에는 카세트테이프들이 있었다. 우리 남매 교육용으로 구매하셨을 한국 전래동화 모음집, 영어 동요 모음집, 대중가요 테이프들이었다. 모음집에는 테이프가 다섯 개 정도 들었고, 나는 테이프 겉면에 적힌 번호순으로 꺼내 전축 카세트꽂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어릴 때는 뭐든 순서대로 했다. 연속성이 없는 위인전 전집도 1권부터 차례대로 읽었고, 책상 서랍 정리를 할 때면 위 칸부터 내려오면서 정리했다. 초콜릿 상자를 열었을 땐 제일 위쪽에서 제일 왼쪽 초콜릿부터 먹었다.


  다섯 개 테이프를 하루 안에 다 듣지는 못했다. 그러면 다음 날, 첫 번째 테이프부터 다시 꺼내 들었다. 특이한 습관이었다. 그러다 보니 카세트테이프 모음 중 첫 번째가 언제나 빨리 늘어졌다. 그중 딱딱한 풀빛 색 상자 안 영어 동요 모음집 1번 테이프를 열심히 들었다. ‘헬로우, 헬로우, 헬로우, 하와유, 암빠인, 암빠인(Hello, Hello, Hello, How are you, I’m fine,  I’m fine)’ 영어를 읽을 줄 모르던 때라 들리는 대로 따라 불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목소리가 나오고, 호랑이와 토끼 목소리도 나오는 한국 전래동화 모음집도 즐겨 들었다. 성우가 동화 한 편을 들려주면 동요 한 곡이 이어 나오는 형식이었다. 역시나 첫 번째 테이프를 많이 들었는데, 흐릿하게 남은 기억으로 당시 들었던 노랫말들이 지금까지 입가에 띄엄띄엄 맴돈다.


  그렇게 좋아하던 전축 소리가 듣기 싫은 시간대가 있었다. 어머니가 우리 남매를 깨울 때다. 어머니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새벽 6시부터 나와 남동생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온 집안에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다. 그럼 우리는 들어오는 찬 공기와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 때문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그리하여도 우리가 깨어나지 않으면 어머니는 이불을 걷어가고, 전축 소리를 가장 높게 올렸다. 아침마다 라디오 DJ 목소리가 내 귓속을 난타했다. 나와 남동생은 누구라도 한 명이 먼저 일어나 라디오를 꺼주길 바랐는데, 내 방 앞에 전축이 있어서 라디오 끄기 담당은 주로 나였다.


  DJ 목소리와 싸우다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때 몸을 일으켜 라디오를 끄고, 열린 창문을 닫고, 이불 정돈을 했다. 눈을 비비며 어머니에게 가면 따뜻한 물 한 잔을 주시면서, 물 마시고 세수하고 잠 깨면 아침 먹으러 오라고 하셨다. 아침밥 먹기는 어머니가 우리를 키우는 철칙 중 하나였다. 어머니에게는 또 다른 철칙이 있었는데, 아버지에게 출근 인사드리기였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하는 어린 남매가 기특했는지, 동네 어른들에게 칭찬도 제법 들었다. 인사와 아침밥을 위해 어머니는 날마다 라디오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새벽부터 전기철물점 문을 열고 장사를 시작하면 우리 남매를 돌볼 시간이 없기에 어머니는 곤히 자는 아이들을 깨워야만 하셨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는 라디오를 다시 켜고, 소리를 적당한 높이로 조절했다. 아침 라디오 내용은 대부분 날씨, 출근길 교통 상황, 시사, 전날 밤 사건·사고 소식들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이 밤늦은 시간에 하는 감성 어린 라디오에 빠진 동안에 나는 주부와 직장인들이 겪는 일상과 애환 사연을 들으며 자랐다. 그런 사연을 읽은 DJ들이 하는 응원 말에 나도 덩달아 힘을 얻으면서 말이다.


  라디오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들어왔다. 두 시간 간격으로 만나는 DJ들이 반가웠고, 방송 유형별로 다른 특성이 재미있었다. 몇 년간 진행하던 DJ가 바뀌면 오랜 친구가 떠나가듯 아쉬웠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하는 재미도 있었다. 녹음 방법은 아버지가 알려주셨다. 이제는 듣지 않는 동요 카세트테이프 위쪽에 나 있는 구멍을 휴지로 콕콕 눌러 막고, 녹음 버튼을 누르면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녹음됐다. 녹음이라는 기술이 어찌나 놀랍던지, 녹음하고 싶어서 라디오를 들을 때도 많았다.


  라디오에 사연 보내기도 좋아했다. 지역 방송국이 있는 안동에서는 수도권과 다른 방송을 내보냈는데, 지방 소도시인 덕분에 사연 당첨이 곧잘 되곤 했다. 사연 당첨 사은품으로 화장품과 샤부샤부 식사권을 받은 적이 있다. 남동생은 라디오에 전화 연결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동생은 방 안에서 문 닫고 열창했고, 부모님은 라디오에서 들리는 아들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며 흐뭇한 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그런 부모님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어느덧 세상에는 동영상 기능이 들어간 핸드폰이 나왔고, 스마트한 핸드폰은 라디오도 들려준다. 음질은 더욱 좋고, 녹음도 더는 필요 없다. 길을 걷다가 들리는 노래 제목이 궁금하면 그 자리에서 검색하면 되고, 게다가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동요도 몇 마디 단어로 전체 가사를 찾아낸다. 손가락 터치 한 번으로 듣고 싶은 모든 노래를 듣는 디지털 시대에서 오래된 전축은 잊혔다.


  디지털로 넘어간 수많은 음원 속에서 나는 어릴 때 라디오에서 듣던 노래들을 여전히 찾아 듣는다. 그런데 같은 노래인데도 그때 그 느낌이 나지 않는다. 왜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옮기다가 지지직 하던 DJ 목소리를 뚜렷하게 들은 순간 느낀 기쁨이 빠져서였다.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까닭을 깨닫자마자, 아날로그 라디오를 서둘러 찾았다. 몇 년 전 때마침 복고 열풍이 불면서 턴테이블 겸용 라디오 제품이 다양하게 출시됐었고, 그중 하나를 집에 들였다.




  지금 사는 집은 결혼하고 세 번째 옮긴 집인데, 첫 신혼집은 남동생 집과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우리 남매가 보고 싶어 한 번씩 올라오신 어머니는 당시 미혼인 남동생 집이 신혼부부 집보다 편하다며 동생 집에서 주로 머무셨다. 어머니가 오시면 건강하고 맛있는 먹을거리가 끼니마다 가득하였다. 어머니가 올라오신 주목적은 따스한 밥상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무더운 여름 낮으로 기억한다. 점심시간에 맞춰 동생 집으로 갔다. 어머니와 동생은 부엌에 앉아 풋고추 꼭지를 떼어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고추가 맵지 않고 맛있다며 한 개를 주셨다. 그 말만 믿고 덥석 깨물어 먹은 고추는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매웠고, 난 뻘게진 얼굴로 물을 마셨다. 어머니는 미안한 듯 미안하지 않은 살짝은 고소한 표정으로 “딸, 미안.”이라고 하셨다. 어머니 표정과 말에 동생은 통쾌하고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나서 어머니는 매워 보이는 고추를 솎아내며, 풋고추 전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어릴 때 외할머니에게 풋고추 전 만드는 법을 배웠다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내셨다. 어머니가 어린이였던 시절, 아침이면 외할아버지께서 손잡이가 달린 라디오를 들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하셨다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와 동생들이 점점 커지는 라디오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단다.


  어머니 기억 속 아침은 외할아버지와 아침 라디오가 함께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말끝마다, “좋은 분이었는데. 정말 좋은 분이었어.”라고 하셨다. 옆에서 동생이 “어머니 행복해 보여요.”라고 했고, 어머니 얼굴에는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던 외할아버지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라디오를 듣고 있는 어린 어머니를 상상해 보았다.


  한가로운 아침이면 아날로그 라디오를 켜고, 창밖을 바라보고 앉는다. 사연 위주 방송이 나오면 차를 한잔 우리고, 음악 위주 방송이 나오면 책 한 권을 펼쳐 든다. 온종일 라디오와 함께하는 날이면 활기찬 방송 시간에 집안일을 하고, 잔잔한 방송 시간에 하루를 마감할 준비를 한다. 외할머니 방에 걸려있던 액자 속 외할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외할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아침 라디오는 딸을 너머 손녀 손자에게 닿았고, 손녀는 라디오 듣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음을.








어머니가 알려준 그대로, 정리하지 않은 조리법

풋고추 전


밀가루를 빡빡하게 개

고추 열 개만 반으로 갈라서 밀가루 묻혀 그냥 구우면 돼

작가의 이전글 언니와 여동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