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의 비극>>은 코엔 형제 중 형인 조엘 코엔이 단독 연출한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단조로운 세트와 흑백화면은 마치 초창기의 영화시대로 회귀한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충실히 담았다.
이런 영화를 필름도, 극장도 아닌 OTT 플랫폼, 애플 TV로 본다는 것.
달라진 영상시장을 실감하는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스코틀랜드의 영주인 맥베스와 뱅쿼는 반란군을 물리치며 공을 세운다. 왕인 던컨은 어려웠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들을 치하하며 크게 기뻐한다.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에 맥베스와 뱅쿼는 세 명의 마녀를 만나고 그들의 이상한 예언을 듣는다.
맥베스, 만세. 이후에 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뱅쿼에겐 이렇게 예언한다.
자손은 왕이 될 것이오. 자신은 왕이 될 수 없지만.
느닷없이 ‘왕’ 타령을 하고 사라진 마녀들. 그들은 의아해하며 지나치지만 사실 맥베스의 마음엔 그때부터 새로운 기대가 싹튼다.
정치권에서는 흔히 선거철이 되면 일명 ‘난가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한다.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지고 주변 지지자들의 박수갈채에 둘러 싸여 있다 보면 어느새 난가병이 슬그머니 찾아온단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가 혹시 난가?’라는 질문과 희망회로를 돌리는 순간, 그들의 마음엔 ‘권력욕’이라는 엄청난 중독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다.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을 듣고 무심한 척했지만 사실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난가병’의 시작이었다.
던컨 왕이 반역자 코더를 처형하며 그의 작위를 맥베스에게 하사했을 때, 그는 그것을 당연하고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음 수순은 던컨 왕이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던컨이 왕자인 말콤을 후계자로 지명하자 맥베스는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마녀의 예언이 틀렸다는 의심을 하기는커녕 예언대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야욕을 불태운다.
예언을 들은 순간 동요되었던 맥베스는 이제 ‘왕’이 되려는 욕망의 화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 내조의 여왕
높은 자리를 원하면서도 고귀하려고 해요.
잘못을 하지 않으면서도 간절히 원하고 있죠.
당신의 귀에 내 영혼을 불어넣어 드릴게요.
황금의 왕관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이 혀의 용맹함으로 무찌를 겁니다.
(by 맥베스 부인)
그의 이런 욕망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은 맥베스의 부인이다. 그녀는 그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왕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법이 부도덕하고 잔혹하며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왕’에 이르는 목적을 위해서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가끔씩 흔들리고 주저하는 맥베스에 비해 그녀의 목적달성에 대한 욕망은 훨씬 단순하다. 그래서 강렬하다.
젖을 먹는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죠.
하지만 아이가 저를 보며 웃고 있더라도
이 없는 잇몸에서 젖꼭지를 빼고 머리를 박살 낼 수도 있어요.
제가 당신처럼 맹세했다면요.
(by 맥베스 부인)
왕이 되고 싶은 남편의 멘탈까지 관리하며 목표한 결과를 쟁취하도록 하는 아내의 특별한 내조는 결국 맥베스가 던컨을 살해하고 그 사건을 위장하게 만든다.
왕을 직접 살해하고 그 혐의를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운 맥베스는 결국 그가 원하는 왕의 자리에 오른다. 예언 한마디에 당겨진 권력욕과 그것을 부채질하고 내조하는 아내 덕분에 말이다.
# 라이벌 관리법
드디어 원하는 것을 얻었다. 맥베스는 왕이 되었고 부인은 여왕의 지위를 누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맥베스의 불안증과 불면증이 시작된다.
손에 피를 묻히고, 믿었던 이들을 배신하며 얻어낸 자리.
그 자리를 위협하는 이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그의 불안과 불면의 밤은 활활 타오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응징을 시작한다. 말하자면 자신에게 올지 모를 ‘복수’의 시간을 예방하기 위해 선제적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역시 불안과 초조는 가진 것을 지키려는 자가 갖지 못해 빼앗으려는 자보다 훨씬 크고 막강한가 보다.
너희 둘 다 뱅쿼가 적인 걸 잘 알고 있다. 나의 적이기도 하다.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아서 그가 살아있는 매 순간 내 생명이 위협받고 있지. 당연히 왕의 권한으로 그를 쫓아내고 내 의지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너희들의 힘을 빌리고 싶고 다른 중요한 이유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해.
(by 맥베스)
어렵게 얻어낸 자리에 앉고 보니 맥베스는 예언의 현장에 있었던 뱅쿼와 그에게 했던 예언이 마음에 걸린다. 한 때 전장을 함께 누비던 전우였고 승리의 순간을 같이 나누던 동료였던 지난 추억은 맥베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그에게 중요하고도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의 아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뿐이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인자는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없애야 한다. 뱅쿼도, 그의 아들도.
하지만 그는 왕이다. 왕이 되기 전 그 자리를 얻기 위해 묻혔던 ‘피’를 더 이상 자신의 손에 묻히긴 싫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진 권한으로 대리인들을 이용하고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 은밀하고도 비열하게 말이다.
무엇을 위한 쟁취였을까?
한 때 유능했던 영주, 맥베스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영혼은 걷잡을 수 없이 잠식된다. 그리고 그가 가진 권력은 그런 불안하고 너덜너덜해진 영혼을 달래기 위한 비열한 도구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피투성이 속으로 발을 들여놓았으니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오.
돌아가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니 머릿속의 이상한 생각이 손으로 옮겨갈 것이오.
실행해야만 하지. 생각하기 전에.
(by 맥베스)
일인자의 심기를 건드리던 대상을 제거했다고 해서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망상과 환각에 빠진 권력자에게 찾아온 마녀들은 또다시 그의 불안을 부추기는 속삭임을 한다. 왕자 말콤과 함께 길을 떠났던 영주,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말이다.
맥베스는 당장 그를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이미 자체 판단 능력을 상실했으며 권좌의 영광도 어차피 마녀의 예언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들의 예언이 국가의 신속한 지침으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025년을 살고 있는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은 기시감에 나는 문득 서글프다.
어쨌든 명령을 받은 부하들은 맥더프의 성을 급습한다. 그리고 일찍이 영국으로 도피한 맥더프를 찾지 못한 그들은 대신 그의 가족들을 몰살한다. 아내와 아들을.
이젠 깨달았다. 이런 현실에 살고 있지.
나쁜 짓은 칭찬받고 때로 좋은 일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는 곳.
그렇다면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여자답게 발버둥 친들 무슨 소용인가?
(by 맥더프의 부인)
권력의 유지를 위해,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가 내리는 명령은 점점 더 과감하고 잔혹하며 주저함이 없다. 그렇게 맥베스는 ‘폭군’이 된다. 가장 나약한 영혼을 숨긴 채로 말이다.
# 별의 순간이 지난 자리
별의 순간.
미래에 운명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결정, 행동 또는 사건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저서,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인류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만한 사건과 결정을 ‘별의 순간’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책의 원제가 <<인류의 별의 순간>>이기도 하다.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그것을 부인에게 알려주며 그들은 자신들의 ‘별의 순간’을 만들었다.
왕을 살해하고 국가적 비상상태를 만들어 예정된 후임자(말콤)를 쫓아내며 스스로 왕과 왕비가 된 것이다.
하지만 별의 순간이 지난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로지 별을 쟁취하는 것에만 온 힘을 다했던 맥베스 부부는 물불 안 가리는 목표달성 이후 찾아온 공허감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 공허의 자리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이 손쉽게 채워졌다.
맥베스는 잠을 죽였다. 죄 없는 잠이오. 근심의 실타래를 풀어주는 매일의 죽음. 힘든 노동 뒤의 목욕. 마음 상처의 치료제. 위대한 자연의 여정.
(by 맥베스의 독백)
맥베스는 던컨을 살해하며 ‘왕’의 자리를 얻는 대신, ‘잠’을 잃었다. ‘잠’이야 말고 인간이 잠시 멈추고 회복하며 스스로를 갱신하는 ‘인간다움’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일 텐데 말이다.
결국 ‘잠’을 잃은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에 짓눌리고 속박되면서도 멈출 수도 없는 신경과민의 ‘괴물’이 되고 말았다.
2021년 대선을 앞두고 한 정당의 비상대책 위원장은 어떤 인물을 두고 ‘별의 순간’을 잡으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실제로 ‘별의 순간’을 잡았던 그는 지금 자신의 직무가 정지된 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 나라의 국민들은 오늘도 광장에 모여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판결을 요구하는 중이다.
별의 ‘순간’에만 집착한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운명은 이리도 고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