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승'의 시간
제1회 응창기배 우승을 석권한 그(조훈현)는 세계바둑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를 향한 고국의 환대. 이제 한국 바둑은 당분간 그의 시대가 지속될 것이다.
국내 유수의 기업 회장은 그에게 후원을 약속하며 자신의 손자를 제자로 받아들여줄 것을 슬쩍 권한다.
하지만 바둑을 하찮게 '돌놀이'쯤으로 말하는 회장에게 그는 손자는 바둑에 아무런 재능이 없음을 서슴없이 말한다. 프로 바둑기사인 그에겐 자신의 일을 하찮게 여기는 그 어떤 것에도 단호할 수 있는 자존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의 눈에 지방에서 온 소년(이창호) 하나가 눈에 띈다. 바둑에 대한 집중력과 승부욕, 그리고 재능을 그는 한눈에 알아본다. 다 이긴 게임이라고 우쭐하던 소년에게 다가온 그는 순식간에 일격을 가하고 소년을 당황시킨다. 소년은 그를 붙잡고 늘어지며 '한판'의 도전을 더 청한다. 승부욕 넘치는 어린 소년에게 그는 미션을 던져놓고 헤어진다.
역시 그가 알아본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소년은 그가 제시한 미션을 풀었고 그것을 편지로 보냈다.
짐작했던 소년의 비범함을 다시 확인한 그는 소년을 자신의 내재자로 받아들인다.
2. '인간'의 시간
기원의 최연소 나이에도 웬만한 어른들을 제치는 소년은 스스로도 우쭐하며 승리를 즐기는 영락없는 어린애다. 스승은 그런 아이에게 기본에 충실한 것을, 그리고 반드시 오른손으로 대국에 임하는 것이 예의임을 가르친다.
까불까불했던 어린 소년은 스승의 집에서 사춘기를 맞이하며 성장해 간다. 점점 더 과묵하고 점점 더 생각이 많아지는 아이로.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 특징인 스승의 화려한 바둑을 열심히 연구하지만 소년은 그것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되는 헛발질에도 자신의 바둑을 느리지만 묵묵히 만들어나간다.
15세의 나이. 내제자로 겨우 5년을 보냈을 뿐인 소년은 최연소로 세계 바둑타이틀을 석권하는 이변을 펼친다.
그리고 드디어 국내 일인자인 스승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한솥밥을 먹고 같은 차를 나란히 타고 그들은 결전의 장에 마주한다.
행마가 빠르고 경쾌한 스승의 기풍은 느리고 두터운 제자의 기풍 앞에서 당황한다.
입에 문 담배는 점점 개수가 늘어간다.
내제자로 두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린 제자는 그의 앞에 호랑이가 되어 나타났다.
너무 빨리 성장한 제자 앞에 스승은 당황한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제자는 자신이 누렸던 모든 타이틀을 묵묵히 가져간다.
스승이기전에 인간일 수밖에 없는 마음.
같은 집에서, 건넌방에서 들리는 제자의 바둑알 내려놓는 소리가 공포의 소리가 될 줄이야.
3. '도전자'의 시간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반집 차이여도 그는 패했고 제자는 승리했다. 기본에 충실하라고 가르쳤던 제자는 완전히 자신의 바둑의 세계를 만들었고 연승을 누린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뿐더러, 제자의 행마 앞에 유독 작아지는 그의 실력.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복잡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대로 자멸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제자 앞에 다시 새로운 도전자로 나선다. 체력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담배도 끊었고 등산도 시작했다.
주어진 게임에는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그는 결과를 수용하고 스승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가로세로 19줄, 361개의 교차점을 두고 펼치는 고도의 두뇌와 멘탈 싸움.
게임의 룰 앞에 그들은 자신의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빽빽한 시간을 버틴다. 그리고 결과를 수용한다.
스승이고 제자였으므로, 오랜 시간 같은 집에서 한솥밥을 먹었으므로, 나이 차이가 컸으므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감정들과 옹졸해지고 나약해지는 순간들을 그들은 게임의 룰 앞에서 삼켜야 한다. 오직 게임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결과를 수용할 뿐이다.
승리한 제자도, 패배한 스승도 아름다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실제로 조훈현과 이창호는 대국에서 만나면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또 너냐?"
"예, 선생님."
"도리 없지. 이것이 승부의 세계니까."
작은 사각형 안의 바둑알 하나하나에도 게임의 룰이 있는 법. 그 규칙 안에서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하고 결과를 수용하는 자들에게 인간의 '품위'를 느끼고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룰인 '헌법'을 두고 오용되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풍경들이 지난 몇 달간 이어졌다. 제발 이제는 멈추기를.
안전하고도 굳건한 게임의 룰과 인간의 '품위'가 공존하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아직 성급한 기대일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멈추고 싶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