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응자와 반항자
리차드 쥬얼(폴 월터 하우저)은 중소기업청 사무실의 비품실 직원이다. 엘리트 직원들의 자리를 살피며 사무용품을 채워주는 일을 하던 그는 소속 변호사 브라이언트를 알게 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당하다 싶으면 통화하는 상대가 제 아무리 상원의원이어도 할 말 다하는 브라이언트(샘 록웰). 리차드는 그의 통화를 한참 서서 듣다가 그에게 들킨다.
리차드 : 엿들어서 죄송해요. 무례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브라이언트 : 항상 그렇게 소심하게 말해요?
상대에게 지나치게 공손하고 주눅 든 리차드가 브라이언트는 낯설고 의아하다. 하지만 리차드는 안다. 퉁명스럽고 자기 성질대로 할 말 다 하는 브라이언트만이 그곳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뚱뚱한 몸집에 딱히 전문적 능력을 가지지 못한 리차드이지만 그에겐 꿈이 있다. 경찰이나 FBI, 또는 첩보기관에서 일하는 것. 비록 지금은 여러 임시직을 전전하며 살아가지만 그는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시민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 로망이다.
리차드가 비품실 직원으로 마지막 일을 마치고 브라이언트에게 인사를 건네던 날. 브라이언트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중에 경찰이 된다면 타락한 경찰은 되지 말아요...... 작은 권력이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도 있어요. 리차드. 그렇게 되지 말아요.
서로 다른 위치, 서로 다른 기질의 두 사람은 그렇게 잠깐의 인연을 맺었다가 헤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생길 줄은 그 때의 그들은 몰랐다. 그날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을 앞두고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에서 폭탄테러 사건이 터진다. 임시 행사경비요원으로 일하고 있던 리차드는 누군가가 버려놓은 가방을 발견했고 그 안에 폭발물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시민들을 대피시켰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던 그곳에서 시민들의 희생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폭탄가방의 최초 발견자였던 리차드는 하루아침에 매스컴에 의해 영웅이 되었다.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시민의 수호자가 되고 싶지만 아직은 여전히 임시직을 전전해야하는 평범한 소시민 리차드는 가장 드라마틱하게 꿈을 이룬 것일까?
어떻게든 그날의 사건에 대한 진상과 책임을 져야했던 FBI는 결정적 사건의 단서를 찾지 못한 채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최초의 발견자, 리차드를 의심한다. 그리고 한밤 중 바에서 술을 마시던 FBI요원, 쇼(존 햄)는 특종에 굶주린 기자의 유혹행위에 리차드를 용의자로 지목했다는 내부 사실을 말하고 만다.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었던 리차드는 이번엔 사건의 주범이 된다.
근거 없는 국가기관의 의심과 특종을 쫓는 언론의 합작에 의해 말이다.
궁지로 몰리는 상황에서 리차드는 브라이언트를 찾는다. 그리고 그가 처한 상황을 목도한 브라이언트는 세상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리차드를 위해 발 벋고 나서기로 결심한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세상의 순응자와 반항자.
두 사람이 함께 해쳐 나갈 일이 생겼다.
# 꼴똥과 기레기
센테니얼 공원의 애틀란타 올림픽 전야제 행사가 있던 그날 밤, FBI요원인 쇼는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폭탄 테러를 대비하기엔 현장에 있던 인원은 한참 부족했고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평범한 시민인 리차드가 사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동안 말이다.
언론에서 리차드가 시민 영웅으로 칭송되는 동안, FBI는 그날의 사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들로선 어떻게든 범인을 색출해야만 사건이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범인으로 의심될 사건의 단서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던 조직(FBI)은 자연스레 그날의 폭탄 발견자인 리차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리차드가 잠깐 일했던 대학교의 학장이 한 증언은 그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든다.
학내의 보안을 위해 리차드가 했던 과잉된 업무수행이 못마땅했고 그런 이유로 그를 해고시킨 학장은 언론에서 ‘의인’으로 칭송되는 리차드가 어설픈 치기로 영웅주의에 물든 사람으로 여겼다. 자신이 가진 권위로 판단한 한 인간에 대한 인상적 비평은 이후 리차드가 했던 그 어떤 의로운 행위로도 좀처럼 바뀌지 않은 그의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그런 학장의 고정관념은 또 다른 국가조직에 그럴싸한 먹잇감이 되었다.
그렇게 리차드는 단숨에 용의자가 된다.
결정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수사관으로 양성되며 배웠던 사실들, 즉 단독 폭탄 테러범들이 갖는 일반적인 프로필이 리차드의 특징들과 일치한다는 것이 그들만의 근거가 되었다.
불만이 많은 백인,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
전직 경찰이나 군인, 혹은 경찰 지망생.
너무도 순진하여 이상주의적으로 자신도 언젠가 국가기관의 수호자역할을 꿈꾸는 평범하고 평균적인 인간의 삶은 서둘러 용의자를 결정해야 하는 자들에 의해 제멋대로 찢기고 말았다. 국가기관이 발굴한 좋은 먹잇감은 곧장 언론에게도 따끈따끈한 아이템이었다. 평범한 소시민의 생활공간은 특종에 목마른 언론사들의 뻗치기로 망가져갔다. 리차드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들의 업데이트된 기사를 위한 소재들이었고 짓밟힌 리차드 가족의 인권에 대해선 누구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사냥용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2년간 세금이 체납되었다는 사실은 리차드를 범인이라고 볼만한 결정적인 증거라도 되는 듯이 신나게 유포되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그것이 진실이라고 달려가는 확증편향에 휩싸인 사람들은 리차드의 삶을 마음대로 파괴하는 공동의 가해자들이었다.
# 세상의 가짜들에게
가해자들에게 둘러싸인 리차드를 믿는 사람은 오직 변호사, 브라이언트 뿐이다. 그는 리차드의 눈을 바라보고 그가 한 말을 근거로 그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직접 확인했다. 바로 폭탄 테러가 있던 그날, 범인이 협박전화를 걸었던 공중전화부스와 리차드가 있었던 장소 사이의 거리와 시간을 재어본 것이다. 심증을 굳히기 위해 기소 절차를 만들어가기 바쁜 수사기관 FBI가 하지 않았던 그 일을 말이다.
당신네 얼간이들은 아직 공중전화까지 거리는 안 재봤나 보죠?
브라이언트는 순진한 소시민의 삶을 짓밟는 이들에게 거침없이 따져 묻는다. 타성에 젖은 국가기관의 꼴통들과 검증도 되지 않은 여론을 생산하는 언론기관의 기레기들에게 말이다.
브라이언트 : 이건 정말 소설이 따로 없네요. 관심을 갈구한 폭탄 테러범. 지금 장난해요? 당신이 뭔데 아는 척이에요?
언론사 기자 : 제 일은 사실을 전달하는 거예요.
브라이언트 : 대중을 선동하고 있잖아요.
오만하고 무식한 야망 덩어리.
언론사 기자 : 사실을 듣고 그걸 전달하는 게 제 일이에요.
브라이언트 : 사실? 그럼 진실은요?
또한 FBI 심문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는 리차드에게 브라이언트는 이렇게 말한다.
브라이언트 : 용의자로 대면하는 게 아니라 경찰 대 경찰로 대면하는 거예요. 필요 이상으로 존경심을 나타내지 않아도 돼요. 극존칭을 안 써도 되고요.
리차드 : 그래도 미국 정부잖아요.
브라이언트 : 아뇨. 저들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미국 정부 밑에서 일하는 세 명의 꼴통이에요. 차이를 알겠죠? 저 방의 누구도 당신보다 더 낫지 않아요.
리차드는 믿었다. 국가와 사회를. 그리고 그들이 자신 같은 시민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내세웠던 권위를.
하지만 이제 리차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자신이 뭉뚱그려 신뢰했던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음흉하게 똬리를 틀었던 가짜 권위와 횡포에 대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가짜들에게 움츠려들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범인이라는 근거가 하나라도 있나요?...... 이곳에 와서 창문에 있는 FBI 상징을 보며 생각했어요. 전에는 연방법을 집행하는 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라 생각했어요. 이제는 모르겠어요. 그날 밤 저는 제 일을 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살았어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겨 어떤 보안 요원이 수상한 가방을 발견하면 과연 신고할까요? 안 할 거예요. 가방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겠죠. ‘나는 리차드 쥬얼처럼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 그냥 도망가야지.’ 그러면 안전한 세상이 될 수 없잖아요.
함부로 나서지 말고 군중 속에 묻힌 채로 세상의 방관자가 되도록 부추기는 가짜들. 그들은 조직 안에 속하여 조직의 권위와 이름표를 달고서는 정작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할 뿐이다.
평범하고 순진했던 소시민 리차드는 그것을 몰랐다. 그리고 모르는 채로 자신의 삶이 난도질당하고 파괴되는 것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희생양으로만 남지 않았다. 끝끝내 쓰러지지 않은 채 자신을 지켰고 자신의 말을 세상에 묵묵히 건넸다.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에 더욱 먹먹한 감동을 느낀다.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안정감 있는 연출력과 오디션조차 없이 단박에 캐스팅되었다는 신인배우 폴 윌터 하우저(리차드 역)의 실감나는 연기는 실제 사건의 현장감과 무게를 더욱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한다.
지난 세기에 타국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에도 그들에게 연대감이 생기는 이유.
세상은 여전히 선하고 용기 있는 자들이 가짜들에게 빅엿을 날릴 수 있는 일들로 가득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새삼스레 살맛이 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