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by 디비딥

0. intro


"태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노예가 죽은 나라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 오는 것이 더 싼 나라
모든 반란은 잔혹하게 분쇄되었고
군벌들에 의해 공화국으로 선포된 나라
(by 내레이션)

남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나라,

축구와 삼바와 아마존의 나라,


이곳은 브라질이다.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노동자 출신의 한 남자가 세 번의 도전 끝에 2003년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Luiz Inacio Lula da Silva).

그는 식민지 이후 군벌들에 의해 21년간의 독재를 지속한 이 나라에서 최초의 민주정권을 세운다.



집권 후, 포퓰리즘이라는 비판과 우려 속에서도 그가 이루어낸 성과는 뚜렷했다.


'보우사 파밀리아 정책'으로 대표되는 빈민정책은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빈곤층 감소와 어린이 교육확산 및 생활환경 개선을 이끌었다. 그가 빈민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면서 내건 전제조건은 '자녀를 반드시 학교에 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실질적으로 빈곤층을 감소시키고 중산층을 증가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중산층의 경제능력, 즉 소비활동을 높였다.


식민지의 기억과 장기독재, 그리고 빈곤과 국가부채로 허덕이던 브라질은 룰라의 집권기에 세계 8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

대통령 연임과 80%가 넘는 국민적 지지로 이어진 그의 인기는 그의 후계자 '지우마 호세프'로의 정권 이양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 '반동'의 시간은 잠복되어 있었다.



1. 연정(연립정부)의 함정


브라질 의회는 한 정당이 과반수를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실제로 의회에 진출한 정당이 20개가 넘으며 룰라의 집권기에 제1당인 '노동자당'조차 의석수로는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못했다. 대통령 중심제임에도, 절대적인 국민적 지지에도, 과반의석을 차지할 수 없는 현실은 국정 운영의 걸림돌이었다. 이 때문에 노동자당으로선 여러 정당을 끌어들여서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현실적인 자구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패'의 가능성은 곳곳에 상존하고 있었다.


대중의 압력과는 상관없이 정치계급은 다 함께 저질러 온 오래된 부패의 시스템을 영속화했습니다. 그런 시스템은 누구 하나 손대지 않은 상태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수십 년간 지속됐습니다.
(by 내레이션)


우리의 실수는 우익 패권주의가 늘어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거예요.
(by 지우마 대통령 인터뷰)


당을 초월하여 만연한 부패의 관습은 노동자당과 민주정부의 어느 깊은 곳에서도 암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사회개혁의 정당성을 희석시키고 급기야 발목을 잡는 일이 벌어지고야 만다. 세르지오 모루 검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세차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 브라질의 대략의 정치상황은 이러했다.

지우마 대통령은 이전의 정부 기조를 이어가며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갔다. 보우사 파밀리아 정책은 계속 이어졌다. 브라질 민주 운동당 출신의 인사들을 정부 요직에서 해임시켰다. 연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많은 정치 부패 관련자들을 보유한 정당이라는 한계는 정권의 도덕성과 정당성에 흠집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부양을 꾀하며 이자율을 인하했다. 이는 은행가들의 반발과 도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때마침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국내의 경제실정이 맞물리면서 정부에 대한 반발과 경제위기의 불안이 야기되었다. 경기침체와 국민적 지지율의 하락은 개혁의 피로감과 기득권 연장의 욕망을 가진 이들에게는 반격을 위한 최적의 타이밍이 되었다.



2. 실화범죄스릴러의 주인공이 된 스타 검사의 탄생


자동차를 세차하듯 오랜 부패를 깨끗이 청소하겠다는 이른바 '세차작전'.

미 국가 안보국 감시대상이었던 국영 거대 석유기업 '페트로브라스'가 건설사 및 주요 정당들과 모종의 관계를 형성하고 뇌물을 주고받았다는 것이 수사의 핵심이었다.

사건의 수사를 주도한 자는 세르지오 모루 검사였다.

언론 플레이에 능하여 수사 중인 사건의 내용을 언론에 흘리기를 서슴지 않았고, 용의자들이 더 중요한 인물을 고발할 때까지 재판 없이 구금하여 사건의 관련자들을 굴비 엮듯이 이어갔다.

그는 마치 자신이 실화범죄 스릴러 영화의 주인공이자 해결사가 된 것처럼 스스로를 연출했다.

정권의 인사들과 관련 정치인들이 줄줄이 연행되었고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지우마 정권은 위기에 봉착했다.


노동자당은 정치과정에서 이 모든 수직적이고 관료적인 타락한 형태와 싸우면서 탄생했죠. 당이 성장하고 권력을 다루게 되면서 뭔가를 잃었어요.... 우린 쉽게 거물들과 친구가 될 줄 알았어요. 선거운동자금융통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요. 정치개혁을 이루지 못한 겁니다. 기업에서 선거자금 받는 일을 그만뒀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노동자당이 다른 당과 똑같은 짓을 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사법부 친구들이 우리 당을 다른 정당과는 다르게 취급하리라는 점을 완전히 잊고서 말이죠.

(by 전 노동자당 사무총장 지우베르투 카르발류의 인터뷰)


경제계 인사와 정치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오랜 부패의 관행이었지만 모루 검사가 조준하는 방향은 정확했다. 바로 노동자당과 지우마 정권, 거슬러 올라가 룰라 전 대통령이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진 스타검사의 활약과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는 정권을 흔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정권의 반대편에서 기회를 노리는 자들의 구체적인 음모가 조직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3. 불복자와 반대자

지우마 정권이 위기를 맞이하면서 그녀와 대선 상대였던 아에시우 네메스는 일찌감치 대선 불복을 주장하며 선거조작설을 제기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선거에서 진 것이 아니라 범죄집단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이라 주장하며 대통령 탄핵을 위한 로비활동을 벌였다. 소셜 미디어(SNS)를 활용하여 룰라-지우마 정권의 부패에 대한 비난여론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저는 아에시우가 민주적 게임의 룰을 의문시함으로써 자신이 어둠의 힘을 일깨우게 된다는 걸 알았을지 궁금합니다. (by 내레이션)


선거의 불복자가 탄핵을 로비하는 사이, 의회에선 지우마 대통령에 대한 구체적인 탄핵절차를 준비했다. 탄핵의 사유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인플레이션과 경기불황, 그리고 회계부정 등의 이유를 두루뭉술하게 합쳤다. 말하자면 온갖 나라의 문제가 지우마-롤라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탄핵의 구체적인 실행은 자신들의 부패는 슬쩍 감추고 그들(지우마 - 롤라 정권)의 부패는 확대하며 그들의 잃어버린 영광과 기득권을 찾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전체 탄핵과정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부분이 이 탄핵절차를 진행하는 이유가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반 이상의 상, 하원 의원들이 사기나 노예제도, 심지어 살인 등의 이유로 수사 중이거나 기소됐다는 상황 때문인가요?
(by 탄핵안 표결을 앞둔 기자의 질문)


저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불공정하고 자의적인 기준으로 탄핵에 회부됐습니다.
정부 수반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갈아치우겠다는 것은
저를 고발한 분들의 바람처럼 적법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국민입니다.
오직 국민만이 투표로 그렇게 할 수 있죠.
(by 탄핵안 표결을 앞둔 지우마 대통령의 항변)


2016년 8월. 제36대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안은 '그들'에 의해 가결된다.



4. 혁명보다 어려운


정치적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고 반대자에 대한 사법 쿠데타가 자행되는 사이, 나라의 국민들은 정확히 두쪽으로 나뉘었다. 매우 극렬하고도 극단적으로.


군부의 개입이 이 나라를 치료할 겁니다.
이 분은 훨씬 나이가 많으신데 독재정권시절이 훨씬 더 좋았다고 하세요.
장군님들, 지금 어디 있나요? 군부개입이 치유할 수 있어요.


노동자당과 지우마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문제 삼는 시민은 군인들이 다스렸던 그때가 좋았다고 회상했다.

당신 친척은 군부 독재 시절에 안 죽었잖아?

그러면 군홧발의 트라우마를 씻지 못한 또 다른 시민은 이렇게 반문했다.


지우마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직무정지가 되자 그녀의 관저를 청소하는 한 시민은 자조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국민들이 지우마를 끌어내린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죠. 유권자의 선택도 아니고요.
사실 민주주의란 건 없잖아요. 전 없는 것 같아요.
우리의 투표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한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 역량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브라질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인용하며 문득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극단으로만 치닫는 대립도, 혹은 수동적인 체념도 민주적 역량을 키우는 방식은 아닐 텐데 말이다.


지우마 대통령의 탄핵 이후 공식적으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룰라 전 대통령은 기자와의 한 인터뷰에서 왜 혁명보다 개혁이, 그리고 민주주의가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후회되는 건 많죠.
그중에서 제일 후회되는 건 내가 대통령이었을 때 새로운 언론규제를 하원에 발의하지 못한 거죠. 9개 가문이 브라질 전체 언론을 경영하잖아요.
우리에겐 수백 년간 쌓인 편견이 있어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이 수백 년간 지배해 왔죠.
그 모든 걸 바꾸려면 정말 어려워요.
하지만 혁명이 나서 반은 전투에서 죽고 반은 도망치게 되면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은 나라에서 그랬죠.
하지만 우리가 했던 방식대로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 파업권, 저항권을 보장하고 의회가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둔 상태라면요?
훨씬 더 힘들지만 보상은 더 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민주주의의 가치가 무엇인지 배우니까요.
(by 롤라)



5. 결코 끝나지 않았다.


전방위적으로 수사를 펼쳤던 '세차작전'의 최종 종착지는 전직 대통령이자, 또다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룰라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수사를 시작한 애초부터의 기획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루 검사는 자신이 수사했던 세차작전의 최종 주범을 룰라로 지목했다. 그가 말한 대로 나라 전체를 흔든 거대사건의 주범이었음에도 룰라의 실제 기소는 건설사로부터 아파트를 받았다는 혐의로 이루어졌다.

수사 중인 내용은 언론에 무분별하게 뿌려졌다. 기소의 구체적 증거가 나오지 않자 모루 검사는 '증거가 없는 것은 그만큼 증거를 잘 숨겼다는 증거'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펼쳤다.

전직 대통령의 기습적 체포와 수사의 전 과정은 TV로 생중계되었다.

민주주의에 의한 통치의 구성요소로서의 사법부는 '법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그것을 파괴해 갔다.


브라질 사법 시스템이 특이한 것은 검사가 판결까지 한다는 거죠. 모루판사 같은 수사판사는 용의자를 지목해 도청을 지시할 수도 있고 가택 수색도 할 수 있어요. 그런 다음 용의자를 기소해서 공판 판사에게 넘기죠.
(by 룰라의 변호사)


옥중 출마라도 불사하겠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룰라는 항소심에서 기존의 9년 6개월의 형량이 12년 1개월로 형량이 늘어났다. 그리고 2018년 4월 6일 그의 체포 영장이 집행되었고, 9월 1일에 출마자격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치러진 제38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부 출신의 보우소나르가 당선된다. 그리고 그의 내각에 세르지오 모루 검사는 법무부 장관으로 합류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건 군대예요.
우린 항상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죠.
빨갱이 범법자들은 우리나라에서 근절될 것입니다.
(by 보우소나르)

2019년에 제작된 영화는 보우소나르 대통령의 당선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21년간의 군부 독재를 끝내고 민주정부를 세운 나라가 한 명의 대통령은 탄핵되고, 또 한 명은 투옥되며 과거로 회귀하는 가장 암담한 시간의 브라질을 목도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후에 브라질에서 펼쳐진 상황은 영화를 만들었던, 그 절망의 시간을 또 한 번 뛰어넘었다.

집권 이후 보우소나르 대통령의 무능과 실정이 이어졌고, 세르지오 모루 검사의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의 위법성이 밝혀지며 대법원은 룰라에게 선고한 유죄판결에 대해 무효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2022년 10월 30일 룰라는 브라질의 제3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혹은 브라질의 현실을 2024년의 대한민국의 상황과 중첩시키다 보면 드는 생각.

민주주의는 몹시 '취약'하다.

누군가의 의도로, 혹은 법과 제도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쉽게 망가지고 훼손되며 아무에게나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용어로 남발되기도 하는 참으로 이상하고도 포괄적인 용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인 걸까?


그럼에도 여전히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역사적 진실이, 기억이, 불의에 대한 대응이 누적되어 갈때 망가졌던 민주주의는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2018년 수감되기 직전, 긴박했던 상황 속에서도 룰라가 확신을 가지며 했던 연설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민주주의의 힘과 속성을 잘 알려주는 것 같다.




제 사상을 멈추게 하려고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벌써 다 퍼져서 잡아 가둘 수가 없어요.
제 꿈을 중단시키려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제가 꿈꾸기를 그쳐도 여러분의 정신과 꿈을 통해 꿈을 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은 하나, 둘, 백 개의 장미를 죽일 수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투쟁은 봄을 찾고 있습니다.
(by 룰라의 연설)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3분.

심심하고 평범했던 나의 일상이 무너졌다.

겨울여행을 해보려던 소박한 기대도 김이 새버렸다.

누군가에겐 그날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경제적 손실로, 혹은 불안과 분노로 채워졌을 것이다.


한 순간에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자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광장엔 진짜 민주주의를 되돌려놓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매일 밤, 모이고 있다.


혼돈의 시간.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역사적 경험이, 불의에 맞섰던 저항의 기억이, 결국은 시민의 권리를 되돌려놓았던 영광의 순간이 차곡차곡 쌓여서 오늘의 위기를 잘 극복하리라 희망한다.

우리가 가진 민주시민으로서의 저력과 움츠러들지 않는 신명이 그러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민주주의는 영원한 완성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끊임없이 가꾸고 유지하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브라질의 현실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토록 처절하게 알려준다.




keyword
이전 19화[카운슬러] 오만이 두드린 지옥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