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집이창피했다. 오래된 단독주택, 가난한 살림살이, 이단에 빠져 이혼한 엄마, 알코올 중독인 아빠, 무관심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내 배경에 관해선 어느 것 하나 떳떳한 게 없었다.
3월이 되어 새 친구들을 사귈 때마다 창피한 집안 배경이 드러날까 조심스러웠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곤란하게 했던 건 엄마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제 우리 엄마가 제육볶음 해줬는데 엄청 맛있었어.혜원아, '너네엄마'도 요리 잘하셔?"
"어? 아.. 아니.. '우리가족'들은 다 요리 못해. 근데 너 어제 그 드라마 봤어?"
또 대답을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렸다.
엄마가 없다는 말을 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렇게 불쑥 들어온 질문에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아니었다. 이혼이 옛날보다 흔해졌다고는 하지만, 나처럼 엄마가 없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이 있겠지라고 상상할 뿐,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엄마가 이단에 빠져서 집을 나갔다는 건 '나는 버려진 아이입니다. 날 낳아준 엄마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했어요.'라는 뜻 같아서 말하기가 더더욱 힘들었다.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친구들이 미안해하며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도 싫고,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 눈치를 보는 것도 싫었다.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싶진 않았다. 친구들이랑 있을 때만큼은 나도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고 싶었다.
집안 배경은 나의 일부라 하기엔존재감이 너무 컸다. 그땐그게 내 전부인 것 같았다.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주면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왜 좋아하는 걸까? 나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나서도 계속 좋아해 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경계선 너머의 금지된 구역까지밝혀지고 나면,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질까 겁이 나기도했다.
부잣집 친구와 가까워질수록내면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친해지고 싶으면서도, 더 이상 친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 그 사이어딘가에서 혼자 우물쭈물 대며서성거렸다.학교 밖에서도만나자고 할까 봐 불안했다. 돈이 없으니 밖에서 만날 수도 없고 초라한 우리 집에 초대할 수도 없었다.있어야 할 엄마는 없고, 직장에 있어야 할 아빠는 집에 있었으니까.
이리저리 고민해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 아픈 일은 차라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힘들수록밝게 웃었다. 자연스레 명랑하고 활기찬 애, 긍정적인 애라는 수식어가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그런 사람이라고,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면진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믿으며, 현실을 속이고 슬픈 마음을 외면했다.
그러나 해소되지 못한 슬픔은 결국 나를 책으로 이끌었다. 거기엔나 같은주인공들이 있었다. 우울한 내 마음을 쏙 빼닮은 사람도 있었고 나보다훨씬 더 고통스러운 아픔을 겪은 이도 있었다. 세상엔 내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고통과 슬픔이 존재했다.
가난에 허우적대는 것도,말 못 할 가족사를 가진 것도,아무 말 못 하고 꾸역꾸역 슬픔을 쌓아두는 것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안도감이 들었다. 몇백 년 전의 사람일지라도, 같은 국적이 아닐지라도, 나와 같은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또 있었다는 묘한 동질감. 그 동병상련이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했다.
위인전의 누군가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누군가는 노비의 신분이기도 했으며, 또 누군가는 누명을 써서 기약도 없는 긴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엄청난 불행들이 겹겹이 닥쳐올 때, 그들은묵묵히 자신의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읽어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나도 이들처럼 살 수 있을까. 내 인생도 이들처럼 멋지게 성장할 수 있을까.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으면, 몰아치던 불안은 어느새 고요한 바다로 변해 있었다. 삶에 대한아주 작은 원망도 모두내려놓고 싶어졌다. 헛된 미움으로 나를 갉아먹는 대신, 어떤 불행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좁은 방 안에서 읽고 또 읽었던 멋진 주인공들의 이야기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나의 이야기도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