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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Dec 24. 2020

할머니, 비가 와도 절대로  데리러 오지 마세요!

청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쿠르릉.. 쏴아아...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더니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다.

'소나기인가? 일기예보에 비 온단 말은 없었는데.. 하필 수업 끝날 시간 비가 올게 뭐람..'


여름의 끝자락, 토요일이었다. 창문 밖에는 어느새 빨간색, 노란색 등 색색의 우산들이 교문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딸이 비를 맞을까 봐 마중 나온 엄마들이었다(그때는 여중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안 왔겠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오면 안 되는데…….'


이런 일을 대비해서 미리 말씀드렸었다.


"할머니, 비가 많이 와도 학교에 데리러 오지 마세요. 집 가까우니까 뛰어오면 금방 와요. 핸드폰도 없는데, 학교에서 청소하느라 늦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러니까 절대 데리러 오지 마세요! 알겠죠? 꼭이요!"(간절히 부탁할 때만 존댓말이다.)


치기 어린 마음에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다. 그땐 요즘처럼 맞벌이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다들 엄마가 데리러 오는데 나만 할머니가 오면, 모두가 우릴 힐끗힐끗 쳐다볼 게 뻔했다.


혹시라도 눈치 없는 누군가가 "너네 엄마도 일하셔?"라고 물어보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 초롱초롱한 눈빛과 무해한 얼굴에 대고 왜 이리 눈치가 없냐며 쏘아줄 수도 없고. 그쭈뼛쭈뼛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니 그런 일은 미연에 방지하는 게 최선이었다.


혹시 할머니가 약속을 잊어버렸을 까 봐 걱정이 됐다. 아빠나 할아버지면 몰라도, 할머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니까. 앞에선 분명 알았다하고선 뒤돌아서면 까먹어버 게 벌써 몇 번째인지! 그러니 할머니의 '알았다'는 진짜 '알았다'로 들을 수가 없었다.    


1층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쿵쾅거렸다. 현관에서 실내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는 동안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다행이다. 할머니가 정말 안 오셨나 보다. 어휴, 십 년 감수했네.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은 게 이렇게 감사할 줄이야!


다행히 옆집에 사는 친구도 어머니가 일하셔서 마중 나올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우산 대신 가방을 머리 위에 들고 세차게 내리는 빗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꺄~~!! 으헤헤헤~!!"

비 오는 날 이런 괴상한 웃음소리라니. 할머니가 안온 게 기쁘고, 이 상황도 재밌고, 비에 쫄딱 젖은 친구 얼굴도 웃겨서 한바탕 웃음이 나왔다. 귀에 커다란 꽃만 꽂으면 완벽했을 텐데! 


앞에서 아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보이면 그 옆을 쌩~ 하니 달려가면서 "안녕!" 하고 인사하는 여유도 부렸다.


저 멀리 횡단보도에 초록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야, 빨간불 켜져! 빨리빨리!"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간발의 차이로 건너가지 못했다. 헉헉 대며 단보도 앞에 비를 맞고 있으니, 같은 반 친구 자기 우산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엄마랑 같이 쓰면 된다고.


"괜찮아, 나 비 맞는 거 좋아해."

환한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드디어 초록불이 켜졌다. "가자!" 총알처럼 빠르게 달려 나가 북적이는 우산들의 틈새를 빠져나왔다.


"잘 가!"

"어! 내일 봐!"


이층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비에 쫄딱 젖은 머리를 감으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창문 밖엔 어느새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인 파란 하늘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그 친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친구들의 우산을 동냥하듯 이 우산, 저 우산을 기웃거리거나 창피하게 혼자 빗속을 뛰어갔겠지. 가 됐든 왠지 좀 처량했을 것 같다.


혼자 있을 땐 가녀린 가랑비에도 마음이 휑하고 쓸쓸했는데, 함께 있으니 장대비에 온몸이 다 젖어도 신나게 웃을 수 있었다. 오히려 청춘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기분이었달까. 우산을 쓴 친구들이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비를 맞던 그날, 나는 참 행복했다.


다행히 소나기를 맞아도 춥지 않은 날씨였다. 여름의 마지막 열기 시원하게 식고 있었다. 세찬 비가 얄궂지 않던, 둘이라서 거웠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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