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유달리운수가좋은 날이었다.친구들과 학종이 따먹기를 하는데 내가 손뼉을 치는 족족, 학종이가 휙휙 뒤집어졌다! 학종이를 제일 많이 잃은 까불이 녀석은집 가는 길까지 나를 졸졸 쫓아왔다.
"야, 한판 더 해!" 내 책가방을 툭툭 치면서 '한판만, 딱 한판만' 노래를 부르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하, 진짜 딱 한 판 만이다? 나중에 딴 말하기 없어."
그러고 나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주섬주섬 학종이를 꺼냈다. 가위바위보를 이긴 내가 선공을 펼쳤다.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손뼉을 치자 때마침 바람이 휭~ 하고 불어학종이 탑이 휘리릭 뒤집어졌다.손 쓸 새도 없이 전재산(?)을 잃어버린 녀석의 허망한 표정이란!
"거봐.넌 나한테 상대가 안 된다니까?"
제 실력도 아니었으면서 한껏 잘난 체를 하며자리에서 일어났다.내 뒤통수를 째려보는 녀석의 뜨거운 눈빛이 느껴졌다.내가 집에 들어간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녀석은 고개를 들어 우리 집 2층을 째려봤다.그런데그때 그 녀석의 눈을 반짝이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바로 베란다 빨랫줄에 걸려있던 요란한 팬티들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부터팬티 쏭이온 교실에 울려 퍼졌다. 어제의 설움을 갚으려는 듯,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 가며나를 놀려댔다. 아, 그 팬티만 아니었어도완벽한 나의 승리였는데! 젠장,분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바닥에책가방을홱 벗어던졌다.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TV앞에서 깔깔깔 웃고 계셨다.
"할머니! 앞으로 내 팬티는 무조건 거실에 널어주세요! 우리 반 남자애가 오늘 계속 놀렸단 말이야. 어제 베란다에 널어놓은 거 다 봤대!"
"빨래는 햇빛에 말려야 잘 말라."
"그럼 걔가 또 하루 종일 놀린다고! 베란다에 널면 절대 안 돼요! 알았죠?"
그 후로도 며칠동안 그놈의 팬티 쏭을 듣느라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었다.집으로 걸어오다가 답답한 마음에 우리 집베란다를 쳐다봤다. 그런데 글쎄, 요란한 팬티들이 또 바람에펄럭펄럭 나부끼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저게 왜 또 저기 있어!!! (성난 헐크로 변신 완료!!)
"할머니!!!! 내 팬티가왜 또 저기 있어?"
"거참, 빨래는 햇빛에 말려야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다고."
"안 뽀송뽀송 해도돼! 동네방네내 팬티 촌스럽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내 팬티는 내가 빨 거니까 건들지 마!"
"저 저, 계집애 성질머리 하고는."
베란다에 예쁜 팬티가 걸려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창피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이게 다 그놈의 시장표 팬티!싸구려 팬티!촌티 팍팍 나는 유치 찬란한 팬티 때문이었다! 저 팬티만 아니었어도!!아,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얼마 전,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갔을 때였다.
"아줌마, 얘가 입을 팬티좀 보여줘요."
아주머니가 내 키를 쓱 쳐다보더니 팬티 세트몇 개를 꺼내 주셨다. 상자에 가지런히 담긴파스텔 빛깔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음~ 고상하고 세련됐군.
"이런 거 말고 더 싼 건 없어요?"
잠시 후 사장님은 멀리서 봐도요란한 팬티몇 장을들고오셨다. 좀 전의 것들과 달리 유아틱 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지금 4살짜리 우리 아들 팬티가 더 세련됐으니 말 다했지 뭐.)
"우리 집에서 이게 제일 싸요."
의자에 앉을 때마다촌티 나는 팬티가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상의가 조금 짧다 싶은 날엔 겉옷을 허리춤에 묶어서철벽 방어를 했다. 그런데그 숱한 노력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내팬티를 기리는 노래까지 만들어져서 이렇게 만천하에공개되어 버렸는데!
내가 직접 빨아서 거실에 널어도 그런 나의 노력을 비웃듯, 어느새 팬티들은 바깥바람을 쐬며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째 할머니와 팬티를 붙들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할머니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결국 할머니를 설득하는 건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종례 시간이 끝나자마자가방을 챙겨 들고 바람처럼 쌩~하니 달려 나갔다. 반드시 그 녀석보다 빨라야 한다! 그 녀석이 우리 집을 지나가기 전에 베란다에 있는 팬티를 사수해야만 한다! 다다다다~ 좋았어, 오늘도 미션 성공!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린 덕분에, 녀석은 한동안 나의팬티를 구경할 수 없었고 드디어팬티 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