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 퇴사의 이륙 결심 속도
플랜 B의 결과가 끝나고 무한정 대기하던 어느날, 어느덧 플랜 A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론은 본부 이동(트랜스퍼)는 탈락. 개인적으로는 플랜 A와 플랜 B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길 바랬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상황을 미리 대비한 셈이 되었네요.
올해 본부 이동자는 36명인데, 그 중 '회계감사본부'로 이동한 인원은 2명이었습니다. 그 중 제가 지원한 본부는 한 명도 뽑지 않았습니다. 이동하시는 두 분은 제가 지원한 본부가 아닌 본부에 각각 이동하게 되셨더군요.
그리고 특기할만한 점은, 저 두 분 전부 회계감사본부에서 회계감사본부로 이동한 케이스라는 점입니다. 회계감사본부도 종류가 여러가지 있습니다. 제조업 하는 본부, 소매업 하는 본부 등등 있는데 저 본부들 사이에서 이동한 케이스라는 겁니다.
저처럼 회계감사본부가 아닌 딜, 택스, 전산감사에서 회계감사본부로 이동한 케이스는 올해 단 한 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회계법인 시장이 많이 어렵고, 누군가를 키워서 쓸만큼 인건비를 후하게 감당하기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입니다.
결과가 발표되는 날 사전접촉했던 선배님한테도 연락이 왔었습니다. 안 좋은 소식을 전해줘서 너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말은 해봤긴 한데, 애초에 채용 포지션을 열어뒀긴 뒀지만 이미 있는 인원들도 놀고 있어서 도저히 사람을 더 받기가 부담스럽다고 하셨답니다. 근데 결과도 안나왔는데 저보고 회계사님 어차피 안될거다. 탈락이다. 다른길 알아봐라 라고 할 수가 없으셨던거죠. 선배님께서 죄송할 일도 아니고, 오히려 갑작스럽게 연락하고 다짜고짜 찾아뵀는데 흔쾌히 만나주시겠다고 한 점이 너무 감사해서 저도 마음을 담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갈 시간입니다.
퇴사 면담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회계법인 기준으로는 하기와 같습니다.
퇴사 어나운스 > 담당 EP(Engagement Partner) 면담 > 본부장 면담 > 노트북, 법인카드, 출입증 반납 및 기타 독립성 체크 > 인사팀 추가면담(Associate 때 퇴사하는 인원 한정)
Associate가 퇴사하는 사례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수습기관에서 수습도 채 떼지 않고 퇴사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경우는 정말 잘 없습니다. 정말 정말 드문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회계법인에서도 Associate가 퇴사하려고 하면 흔히 말하는 당근을 줍니다. 바로 비정기적인 트랜스퍼죠. 즉,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본부장 재량으로 갈 수 있는 감사본부에 보내주곤 합니다. 왜냐면 Associate가 퇴사하면 본부장 성과에 정말 안 좋기 때문입니다. 뭐가 얼마나 어떻게 안 좋은지는 저도 본부장이 아니어서 당연히 모르겠으나, 회계법인 내에 그런 이야기가 정말 파다합니다. 선배님들도 다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마 '니가 얼마나 못 해줬으면 애가 수습도 안 마치고 나간다고 하냐' 인 것 같습니다. 인원의 유출을 막는 것도 임원이 해야할 부분이니까요.
거침없이 면담을 진행하고 있는데, 본부장님께서 슬쩍 말씀을 꺼내십니다.
"왜 벌써 퇴사해?"
"본부 이동 떨어졌습니다. 회계감사 배울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럼 내가 감사본부로 보내주면 너 안나가겠네?"
그런겁니다. 저한테도 기회가 온 것이죠. Big 4의 감사팀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보험으로 땡겨둔 로컬에는 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고 싹싹 빌고 못 간다고 하고 본부장님 다리 붙잡고 제발 감사본부로 보내달라고 사정사정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한 때 비행기 사고에 푹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심각하진 않지만 비행공포증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탈 때면, 특히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까지 호흡이 떨리고 몸이 긴장이 됩니다. 비행기가 얼마나 안전한 교통수단인지 다 알면서도 그렇죠. 그래서 그걸 극복하고자 비행기 사고에 대해 탐독하다시피 많은 정보를 찾아 헤맸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무지에서 오는 공포인가? 싶어서 '비행기 사고가 어떻게 일어나는 건지 알면 공포감이 좀 나아질려나'에서 나온 행위였죠(물론 전혀 효과는 없었습니다. 끔찍했던 사고현장을 많이 보다보니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가속화 된 것 같기도....)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이륙결심속도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V1이라고 많이 표현하는 이 단어는 이륙절차를 중단(RTO, Rejected Take-Off)했을때 활주로를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최대 속도라고 표현됩니다. 그 말인 즉슨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비행기의 속도가 V1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즉시 비행기를 제동하고 멈춰서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만, V1이 되는 순간부터는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도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면 더 큰 재앙이 생겨나겠죠, 활주로를 이탈할테니 다수의 부상자가 생겨날 겁니다. 따라서 V1이 넘어가면 무조건 일단 이륙을 하고, 그 후에 다시 비행기를 돌려 착륙한 다음 문제를 해결한다고 합니다.
(이륙결심속도(V1)에 도달하면, 비행기는 문제가 생겨도 멈출 수 없다. 무조건 일단 이륙을 하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좀 웃기지만, 저는 본부장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이 제 퇴사가 이륙결심속도에 도달한 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쩌면 퇴사하고자 했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죠. 본부장님은 그 말씀 직후, 빅펌에서 배울건 배우고 나가야지 지금 이렇게 빨리 나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아무것도 아닌 회계사로 남고 싶냐, 인생 자체가 애매한 인생이 된다 등 적절한 가스라이팅도 빼놓지 않고 하셨습니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합하신 거죠.
바로 답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부장님은 옛날 같았으면 가고 싶은 본부로 그냥 보내줬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질 않으니, 원한다면 자리가 있는 감사본부 위주로 적극적으로 알아봐주겠다며 좀 더 고민을 해본 뒤 대답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제 침묵을 암묵적인 거절로 받아들이셨는지는 몰라도, 저는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온 것은 아닐까, 내가 한 기회에 갇혀서 다른 기회를 못 보고 있는 게 아닐까. 본부장님이 말씀을 좀 쎄게 하셨지만, 사람 인생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른다고 하시지만 아예 틀린 말씀은 또 아닙니다. 당장 그런 공포가 없는게 아니니까요. 지나치게 빅펌과의 이별이 빨리 다가온 점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적응이 안되고, 현재도 두렵지만 그때는 더 두려웠습니다. 로컬에서는 얼마나 어떻게 더 배울 수 있을까, 열심히 할 자신은 누구보다도 있는데 내 마음과 행동만으로 빅펌 만큼의 성취가 가능한 환경일까. 진짜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되는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요동치곤 했습니다.
상상속에서 저는 비행기와 같았습니다. 정확히는 비행기의 조종석에 앉아있는 기장이었죠.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그대로 출력을 더 높일 것인가, 그 와중에 자꾸 뒤돌아보고 싶어지고 관제탑이 없는 곳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두렵더군요. 저는 10년 경력의 베테랑 기장이 아닌, 이제 막 최소한의 비행시간을 채울락 말락하는 병아리 기장일 뿐인데. 비행기는 날고나서 다시 돌아오면 된다지만 저는 날고나면 공항이 없어집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죠.
다행히 저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잔여연차를 좀 쓰고 나오기도 했고, 그 전주에 들어갈 필드는 담당자의 해외 소재로 인해 필드가 미뤄져서 2주 정도는 주변을 정리할 시간과 사색에 잠길 시간이 있었거든요.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 선배님들이 많고 아직 어린 나이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세는 나이로 27살부터의 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입사부터 본부가 꼬이고, 그 이후에 커리어의 방향도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영 삐걱대고 이탈하기 일쑤였던 것 같아요.
시간이 좀 있고 퇴사를 앞두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니, 저는 좀 더 근본적인 생각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원래 제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 제가 왜 회계사가 되었는지, 회계사로 평생을 살 것인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이런 것 말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지속적으로 치열하게 해야되는 고민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입사 이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배울게 많다는 변명으로 하지 않았죠. 오래되었지만 한번 꺼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