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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츄잉 Jul 21. 2024

3년차 수습회계사 이야기(EP.8)

EP 8. 내가 어떻게 살고 싶었더라


"당신은 왜 회계사를 준비하셨나요?"


 CPA 수험생활을 시작했었을 때가 2019년 1월 초순이었습니다. 평생 머릿속에 선명할 것만 같던 그 기억도 어느덧 해가 거듭할수록 희미해지네요.


회계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 때문에 준비할까요?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라는 단어에 감명받아서? 이해관계자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사명 때문에? 


회계사다보니 주변에 자연스럽게 제일 많아지는 게 회계사들인데 선후배를 막론하고 가끔씩 물어보면 위에 나온 이유들은 헛소리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회계사들의 대부분은 문과생이어서 그런지, '취업이 어려워서'가 정말 큰 이유를 차지합니다. 의외죠. 취업이 어렵다고 회계사를 준비한다는 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상한 게 아닙니다. 취업이 어려워서 2년 정도 백수로 지낼바에야 회계사 공부해서 백수로 2년 지내는 건 똑같거든요. 만약 그러다가 붙으면 좋죠. 즉, 취준 2년과 공부 2년의 리스크가 다르게 취급받지 않는 세상에 온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아니었을텐데 말이에요.


2019년 수석합격하셨던 남 모 선배님의 합격수기에서도 비슷한 말을 찾을 수 있죠. 가타부타하고 요약하면 회계사 준비한 이유는 학점 폭망했는데 취업해서 먹고 살려고 라고 합니다. 사람들 생각하는게 거의 비슷하다는 사례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무슨 사명감을 가지고 회계사를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수험생활을 이겨내려면 꾸준함이 필요한데, 그 꾸준함의 계기가 되는 건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냥 오늘 하루 이 짓거리 하고 있는게 미래에 도움이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 버티는거죠.


저는 투자를 좋아합니다. 투자를 잘 하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닙니다. 투자를 잘하는 사람들은 1년에 수십 억의 수입을 올리며 투자로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시장의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우직하게 스스로의 판단대로 승부를 보는 사람을 얘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저는 아직 애호가 수준인 듯 합니다. 수익을 볼 때는 짧은 기간 내에 목표 수익을 달성하지만, 지금도 주식에 돈이 물려있거든요.


제가 회계사를 준비하게 된 것은 정말 단순하게도 '투자 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입니다. 투자 공부는 결국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서류를 바탕으로 합니다. 대표적인게 사업보고서죠. 투자자들 중에 사업보고서 한 번 안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계사는 그 사업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 들어갑니다. 직접 작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업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재무제표가 기준에 따라 작성되어 있는게 맞는지 보는거죠.


즉 투자 공부를 할 때 단순히 만들어진 서류를 보는게 아니라 그 서류를 만드는 과정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회사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면 훨씬 투자 공부할 때 좋지 않을까? 해서 회계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나 취업이 잘된다거나 하는 건 다 부차적인 문제였죠. 그래서 하루하루의 공부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하던 순간에 있던 날들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봤습니다. 단순히 내가 회계사를 왜 준비했었나, 그래서 회계사로 평생을 살 건가 같은 큰 그림에 대한 생각과, 구체적으로 나는 '어떤 형태의 삶'을 원하나 같은 작은 퍼즐 조각같은 생각도 말이죠. 그래서 아래의 질문에 대해 떠올리고 답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Q1. 회계사로 평생을 살고 싶은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직무를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회계사가 정확하게 뭐 하는건지 모르고 시작했지만 제 성격상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적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 바쁠 때 바쁘고, 쉴 때 쉬고 하는 분위기도 좋습니다. 업무의 내용도 재밌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급여 수준도 일반적인 문과 취업 수준보다 높으니 당장 회계사로 살지 않을 이유도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다른 직무를 고려해봤을 때 생각나는 구미가 당기는 직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평생 살지 안살지는 모르겠으나, 향후 예측 가능한 기간 동안은 회계사로 살 것 같고 거기에 대해 스스로 큰 불만이 없습니다.






Q2. 빅펌에서 파트너를 달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가?






달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근데 보장해줄테니 지금 파트너를 꿈꾸고 달려가는 저 선배님들 처럼 살 자신이 있나? 라고 물어보면 NO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지금 Big4에서 인정받고 파트너를 향해가는 회계사님들을 보면 개인의 삶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주말에도 일에 치여살거나 치여살지 않더라도 일 생각이 가슴을 짓눌러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호소합니다. 실제로 감사팀에서 높으신 직급인 분들은 이혼한 사람들이나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의 분위기가 심심찮게 보인다고 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입니다. 애초에 가정을 돌볼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어느 분야든 임원이 될려면 개인의 삶을 모두 버리고 조직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기본적인 일도 많은데 엄청난 영업 압박까지 이겨내기는 쉽지 않은 일 같습니다. 제가 아직 배가 덜 부른걸수도 있습니다. 혹은 일을 제 1가치로 여기기에는 시대가 변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죠. 여튼 도저히 그렇게 살 자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파트너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떄문입니다.

 






Q3. 개업에 대한 욕심이 있나? 로컬이 안 맞으면 어떡할 것인가?




개업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원래 전산감사본부 같이 특이한 커리어로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저는 Big4에서 6~7년 근무하고 법인을 나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로컬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로컬에 갈거면 좋은 팀을 골라가야 하겠죠. 좋은 로컬을 고르는 같은걸 인터넷에 쳐보면 여러가지 나오긴 합니다만 글로 읽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실전은 다른 법입니다. 한 번에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면 도둑놈 심보이니, 맨땅에 헤딩한다는 마음가짐도 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Big4에서 6~7년 근무하면 30대 중반의 나이에 진입하는데, 이직과 관련한 실수 하나 하나 1~2년을 좌우하는 것이 좀 부담스러워질 나이입니다. 물론 안 맞으면 다시 Big4로 돌아가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그 나이가 되면 '안 되면 돌아가지 뭐'라는 마인드로 나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젊을 떄 바보짓 한번 해본다'라는 마인드로 미리 로컬에서의 삶을 경험하러 나온다는 것도 퇴사 결심한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지금에서의 결정은 그래도 나중에 충분히 되돌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Big4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전산감사의 경험과, 로컬 수준이지만 감사와 용역도 해봤다고 어필해야겠죠.


도망치는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죠. 개인적으로 도망보다는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도전한 결과도 항상 낙원은 아니라는 말을 주지하고 살려고 합니다. 당장 제가 지금 누구나 데려갈만한 매력적인 인적자원이 아닌데, 제가 간 팀이 유니콘 같은 팀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생각보다 다양한 업무를 배우지 못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별로일 가능성도 있고 여러 리스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업무의 깊이도 어쩔 수 없이 낮겠죠. 로컬에서 개업하는 게 훨씬 어렵구나라고 느낄 수 있고, 제 성격이 로컬에서 개업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리스크가 있으니, 오히려 미리 로컬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풀타임으로 2년 정도 근무하면서 실제 로컬이 어떻게 굴러가고, 영업엔 왕도가 없으므로 각자의 영업 방식이 어떤지도 어깨너머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도 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가 로컬에서 계속 있을 것인지 아니면 Big4나 인더로 빠져나갈 것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Q4. 내가 꿈꾸는 라이프 스타일은?






'붓다와 회계사'라는 작가님을 아실까요? 20년차 회계사의 행복론을 쓰신 분입니다. 정말 명작이기도 하고 가슴을 울리는 고민들이 많으니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20년 동안 회계사로 근무하며 본인의 삶을 어떻게 설계하고, 본인이 꿈꾸는 삶은 어떤 삶인가를 정의하신 책인데 후배 입장에서 정말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저는 일을 하면서 그 이외의 시간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삶을 설계해 나가고 싶습니다. 직무에 충실한건 당연한 것이지만,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주객전도의 삶을 원하진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형이든 무형이든 투입하는 원가에 대한 보상 값을 원하는데, 일을 위한 삶에서 그 보상값이 지켜지기란, 그리고 장기적으로 그러하길 바라는 것이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업무 외적으로는 좋아하는 글쓰기, 투자 공부 등의 취미로 삶을 설계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냐, 그게 어떻게 돈이 되겠냐고 되물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가에 대한 리턴 값은 꼭 유형적인 것만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글 쓰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소수나마 좋아해주는 분들이 계시면 그것마저도 엄청 감사하게 느껴지고, 아무도 좋아해주지 않을 지라도 글을 쓰고 저장해놓는 것 자체가 저의 한 부분을 기록해둔다는 의미에서 매우 큰 기쁨을 줍니다. 주말에 약속이 없을 때 한적한 카페에 나와 책 읽고 글을 쓰면서 기록해두는 순간 순간이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장 이게 제 인생에 무슨 돈이 되거나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요.


투자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투자 공부로 한탕을 해먹겠다거나 그런 의도로 공부했으면 오히려 재미를 못 느끼겠죠. 하지만 업무적인 것 뿐만 아니라 업무 외적으로도 개인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고, 그 성장으로 종종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다는 것도 인생을 설계하는 데 행복의 큰 부분일 것입니다.


퇴사를 앞두고 든 생각은, 타인에게 스스로를 설명할 때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이 많아질 수록 행복에 가까워 지고 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회계사입니다" 

"저는 회계사로 일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작가이자 투자 공부도 열심히 하는 개미입니다"


위 보다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는게 더 풍부한 삶이 아닐까요? 물론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행복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절대로 똑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한 행복은 '일 이외에' 저를 정의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기 위해서는 일 외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잘 설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인간의 삶을 설계하는 것은 관심사이고 취미입니다. 출퇴근까지의 시간은 특별하지 않으니 그 이외의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죠. 그리고 특별함은 우연에서 오는 것 처럼, 이러한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나중에 생각지 못한 우연이 되어 스스로에게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과 라이프를 동시에 설계하는 것이 수월할 같아 보이는 로컬에서의 경험도 나쁘지 않을 같았습니다. 깊이의 차이는 있겠지만 Big4에서만 업무적인 성장을 이룰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위의 고민들이 제가 퇴사 결심에 이르기 까지 한 고민들입니다. 적어놓고 보니 특별한 고민은 아니네요. 세상의 진리에 대해 고민했다거나,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한 것들도 아닙니다. 오로지 '저'에 대해 고민했고 '제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지'만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런 고민들은 사람이 살면서 주기적으로 해야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해야할 고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입사 이후에는 일 배우고 바쁘다는 핑계로 게을리했었죠. 오히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제 인생의 이정표 하나를 그릴 타이밍이 생긴거 같아서 그건 그거대로 다행이라는 기분도 듭니다.





이제 다음 에피소드가 3년차 수습회계사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뒤의 새 직장 이직 후 에피소드는 별도의 시리즈 글로 쓸려고 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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